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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Nov 08. 2016

한 중년의 성장기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찾은 마법보다 강한 힘

당신의 삶은 성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기서 말한 '성공'에 대한 기준은 모두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돈'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명예', 혹은 '안정' 뿐만 아니라 '휴식', '여유', '행복' 등 다양한 기준을 갖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성공'이란 목표에 도착했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삶이란 오르내리기 마련이고, 삶이 끝나기 전까지 계속 새로운 목표가 생기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을 향해있고, 우리는 멈출 수 없이 성공을 향해 나아가기를 행할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스티븐 스트레인지'라는 이름의 의사는, 그의 삶에서 '실패'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듯한 정도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스콧 데릭슨'감독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그의 삶을 통해 한 '중년의 성장기'를 그려냈다. 영화가 그의 삶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스티븐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그의 삶은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부, 명예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그는 심지어 그것들이 넘쳐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즉 '성공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는 존재했고, 그의 성공에 의문을 품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는 보란 듯이 전망 좋은 고층건물의 멋진 집에서 수십 개의 고급 시계를 고르기도 하며 최고급 차를 타며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사는 듯 보였다. 물론 그의 노력이 그를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게 했겠지만, 한 가지 그만의 방법이 있었다. 그의 '성공의 비결'은 바로 '실패하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수술을 맡을 때도 너무 간단해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성공확률이 희박한 수술은 피하면서 '실패'하지 않을 수술들만을 맡는다.


물론 그처럼 '실패하지 않는 것'은 성공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성공에 대한 열망'이 이루어낸 모습보단,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도피적인 성공방법이다. 그의 삶은 성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성공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것이 아닌, 실패를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우리들 또한 많은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보단, 실패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늪에서 빠져나오기만을 희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도 언젠간 성공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예상치 못한 위기'앞에 무력해진다. 성공을 등지고 달리다 넘어졌을 때 보이는 것은, 성공을 향한 길이 아니라 다가온 실패에서 나온 절망과 두려움일 것이다. 덕분에 다시 성공을 향해 나아가기보단, 눈앞에 놓인 실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마련이고 그 끝엔 '포기'라는 다소 극단적인 결과가 놓여있을 수 있다. 영화의 그 또한 그러했다. 교통사고로 인해 손을 잃어버린 그는 그것이 곧 자신의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전진이 아닌 뒷걸음질의 결과는 넘어진 그를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그를 과거 속에 가두어 자기파괴만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동료 의사인 '크리스틴 팔머(레이첼 맥아담스 분)'는 그에게 '삶은 끝나지 않았어.'라고 그가 나아가기를 희망하지만, 그는 모진 말을 하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었다. 그는 결국 모든 돈을 탕진하고는 마지막 희망인 '카마르 타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카마르 타지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자신의 손을 고치길 바라며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 분)'에게 애걸복걸한다. 우여곡절 끝에 수련에 들어갔지만, 그는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수전증을 탓하며 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런 그에게 손이 없어도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곤, '순응해'라고 조언한다.


'순응'은 다소 수동적인 단어로 들리곤 한다. 외부의 변화를 포기하곤 내면의 고집을 꺾어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함과 동시에 내면적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된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물론 누구나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두려울 수도 있다. 때문에 영화 속 그처럼 자기 자신을 외면한 채, 주변이 나에게 맞춰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일수록 '순응'은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다.


영화에서 그녀는 그를 에베레스트 산 한복판에 데려다 놓고, 그의 쓸 수 없게 된 손의 외적인 모습과 끊임없이 핑곗거리만 찾던 내적인 모습을 '절박함'을 통해 일체화할 수 있도록 한다. 덕분에 그는 결국 '순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마주하며 성장의 첫 단계를 맞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마법을 하나둘 배워가고 있던 와중에, 위험은 곧 그를 찾아왔다.



에인션트 원의 제자였던 '케실리우스(매즈 미켈슨 분)'는 에인션트 원의 마법의 원천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다크 디맨젼'을 점령한 '도르마무'를 추종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트레인지에게 잡혔을 때, 자신은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고 있다며 그것은 '죽음'을 초월한 '영생'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트레인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간을 막을 수 없고, 누구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우리 모두들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을 것이고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의미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이를 거부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것처럼 '살아감' 즉, '삶'에 대한 의미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끝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고, 지금 살고 있는 시간들을 소중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생'은 곧 '무의미한 삶을 무한히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것이다.


에이션트 원도 '영생'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결국 '죽음'을 막지 못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녀는 단지 '눈'을 보기 위해 시간을 늘리며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삶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었고, 그녀의 단어들은 무게를 싣고 스트레인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녀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스트레인지에게 '나'가 아닌 '함께'라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그는 혼자서는 도르마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에인션트 원의 조언대로 혼자가 아닌 동료들과 '함께' 적을 무찌르러 갔다. 전투는 계속됐고, 결국 도르마무는 지구에 강림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기지를 발휘해 반복적인 시간에 자신과 도르마무를 가둬, 도르마무가 결국 '협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시공간을 지배하며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듯 보였던 도르마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스트레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힘으론 도르마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도르마무는 시공간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트레인지와 도르마무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도르마무는 자신의 힘에 취해 간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서 시작해 '타인'으로 확장된 시야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성장을 보여주고, 그는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수없이 죽고 협상에 실패하더라도 '다시'라는 것을 통해 일어나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성장단계에 놓여있던 일련의 과정들이 그가 세상을 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구했다. 사실 영화 내내 그는 자기 자신을 '닥터 스트레인지'라고 하며, '닥터'라는 수식어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영화 초반 그것은 그가 과거에 갇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 듯하여, 안타까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에서 결국 의사의 삶을 살지 않게 된 그였지만,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평생 동안 쌓아올렸덧 커리어는 무의미해졌고 그는 더 이상 의사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던 '사람을 구한다.'라는 신념이 곧 삶의 목표가 되어 똑바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 '악(惡)'과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될 수 있었고,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의 삶 또한 그가 처했던 것처럼 한없이 무너지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들의 삶은 유의미하고 소중한 것임을 영화는 말해주었다. 영화 속 그가 보여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이르는 성장과정은 그를 내면적 성숙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다시'라는 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물론 현실의 우리는 그와 같은 '마법'이 없다. 하지만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마법'의 힘을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년의 성장기'를 통해 이루어낸 내면적 성숙이 그가 세상을 구할 수 있었던 열쇠가 되었다. 우리 또한 그가 보여준 성장을 통한 성숙한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면, '마법'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갖고 그 어떤 절망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삶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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