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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Nov 21. 2016

'선'과 '악'의 균형 속, 우리들의 삶

영화 ' 콘스탄틴'에서 찾은 밝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

세상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선(善)'과 '악(惡)'으로.


분명 세상이 나아갈 방향은 정해져 있다. 정의(正義)가 실현되고 진실은 외면받지 않아 살아 숨 쉬어야 함을 이상적으로 여기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상응하듯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이라도 하는 듯, 세상 도처엔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곤 믿기 힘든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깨져야 마땅한 세상의 균형은 불행히도 보란 듯이 유지되고 있고, 소위 '선량한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손해'라는 세간에 존재하는 문장처럼 빛을 잃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세상을 배경으로 '선'과 '악' 사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 속에서 문자 그대로 '목숨을 다해' 싸우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프랜시스 로런스'감독의 '콘스탄틴'에서는 '악'을 처단하는, 하지만 '천국'에 가지 못하는 한 남자를 통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으로서의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 그것이 말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존 콘스탄틴' 그의 삶을 살펴보자.


난 콘스탄틴이다.
존 콘스탄틴. 개자식아.


'존 콘스탄틴(키아누 리브스 분)' 말쑥한 외모에 그에 반하지 않는 포한 옷차림은 '악'을 벌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겉모습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혼혈 천사와 혼혈 악마가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세상에서, 그는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졌고 그 스스로 그것을 곧 '저주'로 여겼다. 그는 자신 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죽음'과 '삶'이 혼재하는 광경 앞에 나약한 인간이었을 뿐이었고, 그가 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그는 자신의 '저주'를 '능력'으로 삼아 '삶'과 '죽음', 그리고 '천국'과 '지옥' 그 경계에 살며 악을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던 그 '애매모호한 힘'은 '저주'와 '능력'사이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으로 존재하지만, 분명 그 모습은 정반대의 역할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영화 속 그처럼 영화 밖에서도 '애매모호함'은 누구나에게나 존재할 수 있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은 길'과 '가고 있는 길'이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막연히 꿈꿔왔던 '장래희망'이 현실의 다른 조건들에 덮여 색을 잃어버리고, 그 빈칸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고 여린 시절에 '사로 끝나는 이름의 직업'이 채워지곤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사회인으로의 성장과정에서 겪을 '고민'의 축소판임을 조금 머리가 커서야 깨닫곤 한다.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관심과 능력을 갖고 있어, 그 길로 고민 없이 곧장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끝에서 '꿈'으로 향한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하더라, 이는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능력'으로 삶고 그 길로 나아간 그의 마음이 단지 '죽지 않았기 때문에'라는 다소 가벼운 마음이 아닌, 그것에 '소명의식'을 갖고 목숨을 다해 싸우고 있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렇듯 그의 한껏 무거운 삶에 더한 고통을 주는 또 다른 것들이 있었다. '삶'과 '죽음'그 경계를 다루는 그도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이고, 그 끝이 '지옥'으로 결정된 '죽음' 앞에서 '구원'을 바라며 괴로운 숨을 내쉬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낮은 속삭임에
우린 용기를 얻을 수도 끔찍한 악몽을 겪을 수도 있는 거죠.
천사와 악마의 손길은 지금 우리 곁에 공존하고 있죠.

 

그의 수습생인 '채즈 크레이머(샤이야 러버프 분)'의 눈처럼 그는 한없이 멋진 '정의의 사도'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속엔 문자 그대로 '암덩어리'로 꽉 차 있었고, 그가 아무리 '악'을 돌려보내도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미 그는 '자살'이라는 죄를 지은 상태였고,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그는 '안젤라 도슨(레이첼 와이즈 분)'에게 우리 주변에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며, 그들의 한마디에 '용기'를 얻을 수도 '악몽'을 겪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속죄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영화에서 앞서 말한 대사가 나오면서, 가게 안에서 물을 마시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 앞에서 유유히 물을 마시며 농락을 하는 '악마'와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다가간 점원을 '천사'로 그려내는 장면이 나온다. 혹자들은 '선행'을 의미 없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쓸데없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그 선행의 이유가 '구원받기 위해'로 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빠질 수 있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한 뮤직비디오가 있었다. 한 명의 아이가 넘어진 것을 일으켜주는데 도와주는 것을 시작으로, 작은 선행은 멈추지 않고 전염성을 가져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간다는 영상이다. 그들의 행한 선행들은 결코 큰돈이 들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다른 영상 어릴 적 도와주었던 소년이 자신을 구하기도 하는 '선행의 회귀'를 그려내기도 했다. 이 둘의 영상이 보여준,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선행들이 보여주는 것의 결과는 금전적 이익과 같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사람'이라는 재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함께 사는 것'이다. 때문에 온갖 거짓과 악행으로 물든 사람은 결국 혼자 남기 마련이다. '사람'을 그 '사람'자체가 아닌 '도구'로 보아 휘두르기만 하는 악인들은 결국 자신 또한 도구로 취급되어 버려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선함'은 그것이 힘을 발휘할수록 더욱 커지기 마련이지만, '악함'은 점차 점차 주변을 갉아먹어 결국은 홀로 남게 되는 비참한 최후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이 이러한 '선함'으로만 가득 차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처럼 '선함'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처럼, '악함'또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고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서 장난질을 하여 한순간에 우리를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선'이 손을 내밀어 우리를 구해주더라도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영화는 말한다.


자기희생!


세상을 파괴하여 정복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던 악마 '마몬'을 애석하게도 천사 '가브리엘(틸다 스윈튼 분)'이 돕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인간들은 어떠한 죄를 지었던지, 회개만 한다면 주님의 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불공평해.'라고 하며, 그들에게 공포를 더해 고통을 주기 위해서 이러한 계획을 했다고 밝힌다. 동양 철학의 '채근담'에서 있었던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라는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회개'라는 것을 그녀는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이 설득력이 아예 없는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영화 밖을 살펴보더라도, 극악무도한 죄인이 죗값을 치르고 스스로가 뉘우쳤다고 하여 떳떳해질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수용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들은 부끄러움 없이 뻔뻔해 보이기도 하며,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듯이 보이기까지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회개'는 단순한 '내적 뉘우침'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 보여준다.


그는 악마의 왕 격인 '루시퍼(피터 스토메어 분)'를 불러 그의 아들을 제지하고, 루시퍼는 나름의 빚을 지었다면서 콘스틴틴에게 소원을 빌라고 한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그의 소원은 '생명연장'정도가 최선인 듯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와 마찬가지로 자살을 하여 지옥에 가게 된 '이사벨'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말한다. 루시퍼는 간단히 일을 처리하고 그를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바로 콘스탄틴은 그제서야 '회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악을 처단하는 것을 단순히 자신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해왔던 '내적인 순화'는 그를 천국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왔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자기희생'을 했을 때 결국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즉, 영화는 '자기희생'을 진정한 속죄의 길로 여기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쉬운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선행'처럼 작은 손길을 내미는 것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하기 위해 마음을 먹기까지는 매우 힘든 것임을 영화는 '죽음'과 맞바꿀 정도의 가치로 여긴 것이다.


결국 루시퍼는 억울하여 그를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암덩어리'를 가져갔고, 존 콘스탄틴은 살아남았다.




영화는 다수의 '판타지'의 요소들을 품고 있었지만,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들과 모습들은 분명 현실의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것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익숙함을 더해 이상적으로 여겨지기도, 어쩌면 화나기도 할 수 있다. 누구나 '선행'을 행하는 것이 옳은 일인 줄 알지만 실제로 하루에 몇 번 했는지를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더 나아가 삶을 살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오로지 선행으로만 세상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선행'에 대한 의무감 또한 희미해지기 마련이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보단 자신의 앞에 놓인 하루하루에 발을 내딛는 것조차 힘든 일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변을 돌아보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이 놓여있다. 이곳을 밝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힘들지?'라며 건네는 500원짜리 캔커피가 될 수도 있고, '걱정 마'라는 한마디와 작은 다독임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친절함은 서로에게 기분 좋은 것이 될 수 있고, 가볍게 건넨 친절함은 또한 또 다른 타인에게 전해질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커져가는 친절함은 결국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고, 이러한 분위기는 크고 작은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존 콘스탄틴'은 결국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고 껌을 씹기 시작했다. 그가 갖고 있던 '암덩어리'는 어쩌면 '죄책감'의 다른 모습인 듯싶다. 사람이라면 크고 작은 일에 죄책감을 갖고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암덩어리와 같이 우리를 갉아먹고 나약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을 벗어던지는데 필요한 것을 영화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으로 답으로 내세웠다.


존 콘스탄틴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그대로 천국을 향할 것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 루시퍼가 그를 기다리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많은 '악'들이 도처에 놓여 끊임없이 유혹할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죄책감이란 암세포가 되어 우리를 갉아먹을지, 아니면 그것들을 이겨내고 밝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아갈지는 우리들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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