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호정 Nov 29. 2016

'부끄러움'을 마주하며

영화 '동주'에서 찾은 '부끄러움'의 의미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당당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이상향'과 우리들의  '실제 모습'과의 비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의 끝에서 완전한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면, 그 두 개의 상 사이 괴리감에서 오는 부산물이 잔존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부족함을 보여주며, 어쩌면 나태함과 도덕성의 결여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것들을 한데 아울러 남에게 보여주기에 꺼림칙한 '부끄러움'이란 단어로 존재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부끄러움'은 말 그대로 부끄럽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겐 자연스럽게 숨기게 되고, 심지어 자신 스스로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일은 필수적이지 않을뿐더러,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에 한없이 솔직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쓴 단어들을, 그것들이 쉽게 나왔다는 사실들을 그리고 그 자신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시'를 써 내려갔다. 바로 일제강점기 항일 시인 '윤동주'에 대한 얘기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2015)>에서는 '윤동주'의 삶과 그리고 그와 일생동안 뜻을 같이했던 '송몽규'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그들의 짧았던 순간들을 그려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을 빼앗겼던 그 날, '동주'는 시를 쓰는 소년이었다.


의술을 배워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겠지.
그것이 글한 줄 쓰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 아니야?


'윤동주(강하늘 분)'는 시를 좋아하는 문학 소년이었다. 끄적이며 썼던 시들을 그는 부끄러워했을 뿐이고, 등단하거나 책을 내지 못함에 스스로 '시인'이란 칭호를 부정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응원해주기보단 문예지를 만든다는 그를 나무랄 뿐이다. 그의 아버지는'글 한 줄'보단 의사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 그 어느 것에도 '글 한 줄'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부정했다.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신념과 그것을 구상하는 사상들은 모두 '글'에서 나오기 마련이고, 그것들이 상실된 사람은 더 이상 '좋은 일'이 되지도 '사람을 살아있게' 하지도 못한다. 영화에서 변절한 문학인들의 글들이 그들 안에서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아 뜻을 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일제시대는 그렇게 존재하던 문장을 뺏고 앞으로 나올 단어들까지 뺏어가기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부정했던 '글 한 줄'의 힘을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던 시대는 이미 알고 그것들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렇게 녹아든 단어들은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화에서 그를 심문하는 '고등 형사(김인우 분)'는 그에게 단어 하나를 가리켜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동주는 거기에 '시어는 하나하나 따져가며 읽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답한다. 그의 단어들은 그의 삶 속에서 단지 '어떤 것'이라고 정해버리기엔 더 깊은 고뇌와 큰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단어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는 '시'를 썼다. 자신을 마주하고 그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 수없이 많은 단어들 속에서 헤매고 또 헤매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마주했을 때 '부끄러움'은 새어 나와 그의 단어들을 꾸며냈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시들 속에는 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모습이 가득 담겨있었다.


부끄러움과 마주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과정들에 뜻을 담지 않고 간과한다면, 머릿속에 잔류하여 끊임없이 스스로 색을 더하며 현재 자기 자신의 위치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그것들을 피하는 것이 아닌 마주하면서 딛고 한 계단 성숙하기 위해 그는 '시'를 쓰며 괴리감을 승화시켰고, 그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알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정지용(문성근 분)'은 그에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오히려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을 나무랐다. 그의 외침은 단지 스크린 안의 동주에게만이 아닌 그것을 보고 있던 스크린 밖 우리들에게도 마음속 깊이 닿았다.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부끄러움이란 단어 자체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영화에서 보이는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일제시대'의 모습이며 어쩌면 우리들의 멀지 않은 곳에 놓인 모습인 듯싶었다.


부끄러워서...
서명 못하겠습니다...


는 결국 그 부끄러움들 앞에서 '시인'이 되지 못했다.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의 주동자로 잡혀온 그에게 들이댄 죄목들은 그 시대의 목소리를 내던 청년들과 뜻있는 자들의 피가 가득 서려 있었고, 그 앞에서 '시인'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을 그 스스로 부끄럽다 말했다. 그의 시들 속에 꾹꾹 눌러쓴 단어들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영화 내내 보여주었지만, 그는 그마저도 '부끄럽다'라고 말하며 해방의 염원을 앞세우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이들을 추모하고 자신의 깊은 곳에 놓인 스스로에 역으로 당당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서명하지 않은 것이 아닌 못한 것은 '동주'라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마주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나온 결과물이며, 시대가 만들어낸 그와 그 스스로 사이 거리는 '시'가 되어 우리에게 남았다.




영화는 내내 '흑백'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단지 영화가 '옛날이야기'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화에서 말하는 것들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놓치고 있었던, 바쁜 일상 속에서 더더욱 깊은 색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의 시집은 결국 그가 살아생전에 나오지 못했다. 자신의 시집을 흐뭇하게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부끄럽게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결국 상상 속의 일이 되어버렸다. 동주가 그랬고, 정몽규가 그랬고, 수많은 그 시대의 우리들이 그랬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색을 빼앗겼지만, 그 가운데 끊임없이 외치던 그들의 목소리는 흑백 스크린을 뚫고 그들의 진한 색으로 영화를 다채롭게 만들며 우리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지금 우리들의 시대는 어떤 색인가. 부당함이 정당화되고 비인간적인 모습들이 사회 문제가 아닌 사회의 요소가 되어버린 세상은, 그들이 바라고 바랬던 색채 있는 세상은 아님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 도래한 어둠은 결코 밤이 주는 은은한 별빛 가득한 모습이 아닌, 오래된 일그러진 체계가 만든 거짓으로 얼룩진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 어둠 속 하나의 촛불이 되어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한 들을 위로하며, 새 시대를 위해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힘껏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들이 만난 '부끄러움'이 우리를 당당하게 촛불과 함께 거리로 나서게 함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알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의 불꽃은 잔불이 아닌 프로메테우스의 그것이 되어 더 밝은 세상에 놓일 것임을 알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주'의 무거운 단어들은 우리들 안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과 '악'의 균형 속, 우리들의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