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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Dec 06. 2016

우린 어디쯤에 있는 걸까?

영화 '라라 랜드'에서 찾은 낭만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유한함 속에서 무한함을 바라며 사는 것이라 했다. 우리의 삶의 끝에는 마침표가 놓여 있고, 우리는 그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을 가치로 삼아 인생에 색을 더해가는 것이다. 살아있음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지금 어디쯤에 있는 걸까?'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상과 현실을 비교하며, 그 사이 괴리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 과정을 '성장'이라고 하며,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매번 우리를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속된 성장이 예정되어있는 삶에 전제되어 있는 사실은 언제나 인생이 '완벽할 수 없다'라는 점이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두 남녀가 있었다. 꿈과 낭만이 가득할 것만 같은 '라라 랜드'라는 별명을 가진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향해 마음껏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들의 꿈을 가득 담아 별처럼 빛나는 그곳은 무한한 가능성이 숨 쉬는 곳이며, 그 누구 하나 빛나기를 망설이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삶이 그러하듯 그들의 길은 잘 포장된 반듯한 길이 아니었다.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라라 랜드>에서는 꿈꾸는 자의 도시에 걸맞은 낭만에 선율을 더해 두 남녀의 만남을 풍성하게 그려냈다. '라라 랜드'의 그들은 분명 마음속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이란 새장에 갇혀 마음껏 날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미아(엠마 스톤 분)'는 연기자가 꿈인 '숙녀'이다. 소녀의 순수하고 여린 꿈이라고 하기엔, 그녀는 굳은 각오와 결심으로 6년이란 오랜 시간을 달려왔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오디션을 보는 그녀의 모습은 열정 가득한 모습이다. 같은 '라라 랜드'에 있는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 또한 죽어가는 '재즈'를 살리기겠다는 각오 하나로, 건반 하나하나에 진심을 다해 연주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나온 음악은 돈벌이가 되어버린 '캐럴'뿐이었다. 재즈를 무대 위에서 각자의 악기를 단어로 삼아 벌어지는 논쟁의 현장이라고 설명하는 그 모습 또한 그의 가슴속에 가득히 열정을 품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열정이라는 단어로 가득한 '가능성'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 또한 이처럼 '꿈'과 '현실' 그 경계에 놓여,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가능성이란 단어는 우리의 선택과 기회비용 사이를 저울질하여, 우리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어 방향성을 상실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다가오지 않는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무모함으로 느껴지게 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오는 절망감은 단순히 '경험'이라는 말 뿐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드는 불신은 불안한 요소 가득한 세상 속에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슬럼프라는 단어로 우리의 삶에 공백기를 만들곤 한다. 영화는 이러한 현실 속의 공백에 하나를 더해 빈 공간을 메꿔 나갔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미아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존재할 수 있고 봐주는 것을 원했다. '다수 중 하나'라는 그녀의 세상에 대한 인식은 그녀의 존재감을 지워내 그녀 스스로의 자존감을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녀의 비어있는 필모그래피가 아닌 웃고 있는 미소를 봐주길 원하는 것은 세상에 바라는 욕심 아닌 욕심인 듯 보였다. 그리고 우연이 겹쳐 인연이 된 세바스찬은 '할 수 있다.'라는 말로 무장하여, 그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봐주었다. 그들의 사랑은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헤엄치는 모습으로 그려내며 라라 랜드의 주인공이 된 듯 보였다.


그들이 이루어낸 사랑은 쉬운듯하면서도 현실에선 찾기 힘든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은 분명 투명하면서도 무거운 조건이다. 현실이란 벽은 사랑에 여러 조건을 달아 상대방을 평가하는 품목이 되어버리게 만들었고, 이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상대방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기준이 되어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 영화에서 또한 현실과 꿈 사이 경계에서 스스로에 대한 위치의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자신의 삶에 매달 무거워진 만큼 현실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우리들 또한 그것들을 '책임감'이란 단어로 칭하며 현실에 더해지는 무게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결국 세바스찬은 자신의 것을 포기했다. 그리곤 그녀와 함께 현실에 있기 위해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버리고 현실에 몸을 던졌다. 그를 있는 그대로 보아온 그녀의 눈에는 자기자신을 버린 그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가 찾은 현실과 꿈의 타협점은 그만의 타협점이었지, 그녀와의 타협점은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의 사랑도 이런 데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너무 사랑하기에 짐을 나눠주지 못하고, 혼자 짊어지는 것을 택한다면 분명 나중에 어딘가 멍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깨어질까 하여 손 내밀지 못하는 것은 건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용기가 필요한 것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만이 아니다. 연인관계가 된 이후에 내는 용기는 서로의 관계가 믿음이라는 진한 향기를 낼 수 있게 하는데 꼭 필요하다. 그것이 결코 서로에게 부담감이 아닌 신뢰로 남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결혼이 아닌 연인관계라는 것이 갖는 한계점과 현실이 주는 불안함이 맘껏 손 내밀지 못하게 한다.


'라라 랜드'가 갖고 있는 가능성이라는 성질은 그들을 사랑으로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들을 불안요소들 안에 가둠으로써 이상만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능성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요소가 아니다. 분명 실패도 존재할 것이고, 어쩌면 성공이라 믿었던 곳에 놓쳐버린 소중한 것이 사라져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의 상반된 두 가지의 결과물이 우리를 기다리지만, 그것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두 가지의 면모를 적절하게 제시하며 그들을 도전 속에서 그리고 사랑 속에서 그려내면서 삶을 논했다.




우리의 세상도 그들이 꿈꾸는 '라라 랜드' 못지않은 많은 희망과 불안함이 공존하고 있다. 그 가운데 꿈을 찾아 쫓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끈기가 필요한 일이고,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철이 들지 않았다고 비난하기보단 박수 쳐주기에 마땅하다는 것을 영화는 말해준다. 거기에 사랑이란 색을 더한다면 나아가기에 분명 힘이 되어줄 것이고, 관계 사이에서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진한 색의 '낭만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영화 속 그들의 사랑이 그리고 삶이 어떻게 됐는지는 말을 아끼겠다. 단지 이 '로맨스 영화'가 '사랑'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더욱 깊이 담아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단순하게 흘러갈 수 있었던 사랑이란 소재를 영화는 노래와 함께 더욱 다채롭게 그려냈다. 영화는 스크린 밖 우리에게 미아의 목소리로 '우리는 어디쯤에 있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다. 거기에 '사랑'을 더한다면 우리는 더욱 로맨틱한 삶의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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