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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Nov 03. 2016

영화 제목이 '피아니스트'였던 이유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찾은 '자기 자신'의 의미

든 사람들이 천국에 가길 원하지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꽤 유명한 옛 노래의 제목이다. 말 그대로 사람은 누구나 천국에  하지만, 천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인 '죽음'을 거부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한 문장이다. 하지만 만약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진다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현실 속에 살아간다고 해도 인간은 살고 싶은 의지를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곤 한다. 인류를 통틀어 가장 최악의 순간이라고 꼽을만한 것은 바로 '전쟁'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일어나 타국에 점령당한다면, 자신의 것을 뺏기는 것은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잃을 수도 있다.


익숙한 듯싶은 이러한 상황을 다룬 영화가 있다. 바로 2002년에 개봉한 '로만 폴란스키'감독의 '피아니스트'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폴란드의 평범한 유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쟁이 그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많은 믿기 힘들 정도의 암울한 장면들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그 가운데 '한 인간'을 강렬하게 조명했다. 영화가 보여준 1940년대의 전쟁이 낳은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어차피 죽을 거면, 내 집이 낫죠.


주인공 '블라슬로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 분)'은 꽤 유명한 유대계 피아니스트이다. 평화롭게 연주하던 그의 모습을 포탄의 폭음이 헤치며, 그는 순식간에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있게 된다. 이후 전쟁이 낳은 참혹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폭언과 폭행은 기본이고, 갑자기 누가 죽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표식을 항시 자신의 오른팔에 달고 다녀야 하고, 여러 부당함이 정당함으로 탈바꿈하여 그들 삶을 압박하였다.


문제는 아직도 이러한 현상들이 사회의 이면들에서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낳은 끔찍한 인간적 행위들이 현대는 '돈'이란 것을 앞세워 '갑을관계'로 나누고 약자들은 고스란히 그 부당함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을 뿐이다. '돈'에 의해 시장과 사회가 유지되지만, 그것들이 낳은 돈이 먹이사슬 정점에 오르게 되는 부작용을 막진 못했다. 더불어 '돈'은 곧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여, 우리가 함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묵묵히 따라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도 하다. 70년 전 전쟁이 낳은 그 악행들이 현재에도 뿌리 뽑히지 않은 데는 인간이라는 본질 자체가 변하지 않음에 놓여있는 결과일 수도 있다.


영화로 돌아와 그런 상황에서 그의 자세는 '강한 모습'이 아니었다. 체념한 듯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 비관적으로 보이기도 한 그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집에서 죽겠다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포기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버릴 수 없었던 수식어가 있었다.


자넨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
자넨 예술가라고, 음악으로 용기를 주면 돼.


그는 예술가였다. 그래서 그에게 '음악으로 용기를 주면 돼.'는 그에게 소명을 다하라는 말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한 힘이 존재한다고, 그도 그의 친구도 그리고 다른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를 나타내 주던 음악은 독일군이 유태인들을 조롱하는 배경음악이 되기도 하고, 그의 동생이 갖고 있던 '문학작품'들은 '푼돈'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결국 세상은 그에게서 '집', '가족', 심지어 기본적인 '인간'의 모습까지 빼앗았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서 '그 자신'을 빼앗진 못했다.


어쩌면 현실의 우리들은 쉽게 '자기 자신'을 남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누구든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꿈'이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조금은 모양을 작게 하여 '취미'나 '특기'정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들이 그대로 힘을 발휘하도록 가만두지 않다. 현실의 여러 조건들을 내세우며, 그 쉽게 '시간낭비'로 만들어버리곤 마치 그것들이 '잘못된 것'이 되어버린 듯 보이게 한다. 한국 사회가 갖고 있던 '정답 사회'는 '공부 대학 취업'이라는 단계를 쉽게 기본 정답처럼 만들고 틀에 맞춰 다양한 모양의 아이들에게서 같은 답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똑똑한 영재로 불렸지만,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고 타인이 원하는 답만을 해주며 어린 나이에 슬퍼하던 모습이 이러한 사회가 만든 암울한 결과물인 듯싶다.


영화의 그 또한 자신을 잃지 않았다. 죽음에 초연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전쟁 속에서 살아남으면서, 허공에 피아노를 연주하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순간에서도 흘러나오는 노래에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은연중에 드러냈던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의 흔적과 같았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한 건가?
다시 연주를 해야겠죠.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끔찍한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마지막이라 싶었던 순간까지 음악의 끝자락을 붙잡으며 살아남았다. 독일군 장교의 앞에서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던 그 모습은 잘 차려입고 좋은 피아노의 화려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 생존에 급급했던 한 '인간'의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이 그를 살아남도록 하였다. 전쟁은 결국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지 못했다.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던 순간에 그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나다움'을 갖는 것이 사치인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살아남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기적인 마음을 갖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 언제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 용기를 마음속에 한 줌 품어보자는 것이다. 만약 살면서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고 휘어잡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언젠가 꿈꿔왔던 그 순간을 꿈속에서 현실로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단순히 무자비한 나치의 만행에만 초점이 맞춰져있지는 않았다. 유태인들이 총과 폭탄으로 반항을 하여 독일군들이 죽던 모습은, 환희나 희망의 모습이 아닌 단순한 또 다른 죽음의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놓여있던 주인공의 모습은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이다. 영화 제목인 '피아니스트'란 단어에서 피아노를 치던 모습은 다른 참혹한 모습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듯했지만, 그는 모든 걸 잃어버리는 순간에서도 '피아니스트'였고 영화의 마지막에선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을 꾸며줄 수식어 하나쯤을 담고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그것들이 빛을 내지 못한다 하여, 우리 삶의 제목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그것들을 품고 날개를 펼칠 모습들을 담고 있다면, 영화 내내 전쟁의 모습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제목이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고된 현실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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