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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Dec 23. 2016

꿈꾸던 소년을 구할 주문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찾은 '자유'를 향한 길

공동체의 견고함


어떤 공동체가 오랜 시간 자신의 가치를 꾸준히 추구해왔다면 그것은 곧 '전통'이 되고, 그 공동체 일원들은 정신을 이어가는 것을 하나의 '명예'로 여긴다. 이러한 '공동체의 견고함'은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려, 숭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종교를 포함한 학교, 단체, 더 작은 단위의 가정까지 사람이 모여 오랜 시간 지속된 곳이라면 이러한 요소는 어디든 존재한다. 이러한 것의 가치를 의심하는 것은 권위에 대항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앞서 말한 공동체의 견고함을 자신들의 자부심으로 여기며 당당히 내세우던 곳이 있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윌튼 아카데미'가 그러했다. 그들은 '전통, 명예, 규율, 탁월(tradition, honor, discipline and excellence)'을 아카데미의 표어로 내세우며 미국의 명문 대학들을 일컬으는 '아이비리그'에 학생들을 진학시키는 것을 학교의 궁극적인 목표로 여긴다. 그곳 학생들은 스터디 클럽이 오랜만에 모인 기념식이고, 방학 때의 예습은 자랑거리인 말 그대로 '모범생'인 모습이었다. 그러한 학교에 문장 하나를 갖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선생님이 한 분 오셨다.


현재를 즐겨라!


영문학 담당 선생님으로 새로 부임한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분)'은 여느 교육자와는 달랐다.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과 성적을 위한 수업이 아닌, 영문학이란 과목이 그대로 그들의 삶에 녹아들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를 졸업한, 그리고 세상을 떠난 졸업생들 사진을 앞에 두고 '카르페 디엠'이라는 '현재를 즐겨라(Seize the day)'라는 뜻을 전한다.


물론 그 말을 누구나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세상을 떠난 졸업생들처럼 그들의 그리고 우리의 삶도 언젠간 끝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의 지금이 소중한 이유는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단순히 '즐기기만' 하면 되는 그의 뜻은 어렵지 않지만, 공책에 간단히 쓴 문장 하나가 받아들여지기엔 옆에 놓인 두꺼운 책들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영화 속에선 그 문장을 적은 공책을 북북 찢어서 구겨버리는 것으로, 마치 '현재를 즐겨라'라는 말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들 또한 그들의 반응과 다를 바 없다. 끝이 있는 삶이라지만 여전히 우리의 오늘엔 할 일이 놓여있고, 끝이 오기 전에 맞이할 미래들을 위해 지금을 '즐기기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우리가 일상을 버리고 즐기는 것만을 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사색가'를 원했던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더라도 그는 우리 마음속엔 더 숭고한 가치들을 쫓기를 원했다. 그는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시와 그것들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 낭만, 그리고 사랑은 삶의 '목적'이 되는 더 상위의 개념이라고 말하며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


그리고 그는 책상 위에 올라가며, '다른 시각'을 강조했다.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보기란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다른 각도로 보는 방법 자체를 모를지도 모른다. 그것의 과정은 그처럼 단순히 책상 위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같은 것'만 보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지나쳐온 수많은 기회가 있고,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다양한 것들이 놓여 있다. 그것은 전단지에 쓰여 있던 어느 스페인어 학원일 수도 있고, 헬스장의 표지판일 수도 있고, 요리학원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외국 음식점이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동네마다 있는 도서관이나 아침마다 조깅을 할 수 있는 운동장 등 온갖 새로운 것들을 놓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도 분명 방향은 존재한다. 찰리 달튼(게일 핸슨 분)은 장난스럽게 교내 신문에 '죽은 시인의 사회'를 노출시키며 장난을 쳤다. 선생님이 좋아할 것이라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그에게, 키팅 선생님은 그의 행동이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달튼은 그 행동으로 퇴학을 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기에 그런 것이다. 키팅 선생님이 말하는 새로운 시각은 결코 '다른 기회를 희생'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즐기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그는 말한다. 그는 기회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놓치는'것을 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마음속에 날아오르기 위한 날개를 하나씩 품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꿈으로, 누군가는 사랑으로, 누군가는 용기로 각자의 색을 더하며 남들이 만들어 길이라고 믿게 했던 것들로부터 힘차게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말라


닐이 죽었다.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새로운 꿈에 사로잡힌 채 맞이한 현실은, 그의 굳은 결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는 단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입회 시에 나온 구절처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하는 원초적인 삶의 속성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은 무대에서 자신 본연의 모습에 솔직했던 '연기자'의 모습인 극 중 사용했던 나무관을 쓴 모습이었다. 그가 좌절했던 부분은 그가 위대한 렘브란트나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같은 예술가가 아니라는 사실보다는, 그가 마음속에 '꿈'으로조차 그릴 수 없게 만들어버린 현실에 있었다.


학교는 결국 키팅 선생님을 닐의 죽음의 원인으로 몰아 내쫓아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를 죽인 것은 결코 키팅 선생님이 아니라는 걸. 학교가 내세운 '전통', '명예'와 같은 것들이 오히려 그들을 숨 막히게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체계를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인 사회가 닐을 죽였다는 것을 그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교실 밖을 나서는 키팅 선생님에게 학생들은 책상에 올라가 말한다. '오 캡틴, 나의 캡틴!' 그들의 행동은 그동안 학교가 내세운 표어들에 반하는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그들의 굳센 목소리 앞에서 교장 선생님은 힘을 잃고 당황할 뿐이었고, 그들은 꿋꿋하게 책상 위에서 우뚝 서서 자신 있게 자유를 내비치고 있었다. 결국 키팅 선생님의 퇴출을 막지 못했지만, 그들의 삶에서 앞으로 자유의 날개가 그들 속에서 숨 쉴 것이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89년작으로 27년이나 지난 작품이지만 분명 영화가 보여주는 학교, 그리고 사회가 갖고 있는 '공동체의 견고함'이 수반하는 부작용은 아직도 우리 사회 깊은 곳에서 문제점이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전통'과 '명예'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무리하게 희생을 요구하며, '자유'를 뺏게 된다면 그것은 '탄압'이고 '족쇄'이다. 그것들을 부수는 것은 '닐'그리고 '개인'의 노력만으론 가능하지 않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닐이 '자유'를 박탈당한 채 죽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견고하여 누구 하나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이 키팅 선생님이 말했던 '카르페디엠의 자세'와 '새로운 시각'들을 마음속에 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수많은 뿌리를 내려 그 견고함에 틈을 만든다면, 누구나 꿈이란 단어를 그 사이에 집어넣어 자유를 추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한 명 한 명의 마음이 모여 부드러운 사회를 만들어 낸다면, 키팅 선생님은 우리를 향해 '모두 고맙구나, 고맙다.'라고 인사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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