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호정 Dec 29. 2016

그와 그녀 사이 전쟁, 그리고 하나의 질문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찾은 '왜?'라는 질문


처음이야


처음이란 단어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첫 번째'라는 속성 덕분에, 어느 존재하는 사건에 대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처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바꿔 말하면 처음이란 단계는 이후 찾아오는 일련의 과정들을 가져올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언제나 '처음'은 중요시되기 마련이다. '경험 삼아'라는 가벼운 수식어로 꾸며지는 처음 또한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처음'이 모두에게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성격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처음은 설렘 가득한 삶의 전진을 위한 영광스러운 첫 발걸음 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겐 잊고 싶은 트라우마로 남아, 두 번째 세 번째를 행하지를 못하고 자신을 처음의 이전으로 스스로 가두어 좌절하고 마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같은 처음이라도 이처럼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그리고 각각 다른 색의 설렘과 위험을  있기에 처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생은 누군가의 매뉴얼이 아니다. 발생하는 모든 일에 준비를 할 수는 없다. 준비를 하지 않은 처음을 영원히 피할 수만 좋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오랫동안 인간의 존속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성격을 가지고 그 자체로 인생이라고도 불리는 것들이 있다. 바로 '결혼'과 같은 것이다. 2012년에 개봉한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에서는 이러한 '예상치 못한', 그리고 '원치 않는'의 성격의 '처음'을 맞이한 한 여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영화는 그런 그녀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을지 살펴보자.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너도 알지? 매일 아침 이런 소월을 빌어
'여기가 프랑스였으면 좋겠다'라고


'에바 캐도리언(틸다 스윈턴 분)'은 여행가였다. 그녀의 삶은 '자유'와 뜻을 같이했다. 바닥에 붙지 않은 발이 그녀를 세계 곳곳으로 가도록 시켰고, 그녀는 온 세상 여기저기에 자신의 기뻐하는 모습을 뿌려놓는 듯했다. 타국의 바람은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는 그대로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했다. 가벼워진 마음은 그녀를 잘못된 선택으로 이끌었고, 그 순간은 그녀에게 '족쇄'를 채웠다.


생명을 품는 것은 '축복'이라고 일컬어진다. 생명의 탄생은 인간의 역사에 연장선을 긋는 일이며, 하나의 생명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러한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일기장을 다 채우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써넣어야 했다. 그 이름은 '케빈 캐도리언(에즈라 밀러 분)'으로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는 덕분에 삶의 경계가 뚜렷해져버렸다. '가정'이라는 벽은 그녀에게 안정감보다는 갑갑함을 선사했다.


그녀는 그에게 저주를 내린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라며. 그것은 스스로에게 내려진 족쇄의 열쇠를 그에게 매몰차게 던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그것은 차갑게 날이선 칼과 같았다.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그녀가 생각한 유일한 진통제였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의 적이었다. 그것은 분명 학습의 결과가 아닌 그녀가 내뿜는 인간 본연의 어두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에겐 기(氣)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분명 초자연적인 요소이지만, 다수의 경우의 수를 가진 표정과 행동의 조합에서 비롯된 분위기로 바꿔 생각하는 쪽이 편할 것이다. 그녀에게선 억지스러운 미소와 사랑이 아닌 등 떠밀려 나온 표현들이 있었다. 그의 울음을 소음에 묻어버리는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고, 이러한 것은 그의 행동에 보이지 않은 포승줄을 더했을 것이다. 예전에 TV에서 무표정과 웃는 표정의 엄마의 모습에 따라 아기의 행동 반응이 달랐던 실험이 있었다. 인간 대 인간 사이 감정의 전달 과정에서는 문자만으로는 할 수 없는, 기계가 침범하지 못할 성역이 존재한다. 다만, 그녀와 그에게선 그 신성함이 사라지고 끄나풀이 엉켜져 관계를 더럽힐 뿐이었다.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달라
엄마도 나한테 익숙하잖아.


그와 그녀의 관계는 나아지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가 그를 족쇄로 여기는 한, 그녀의 모성애는 연거푸 헛손질만을 할 뿐이다. 한지붕 아래에 살지만 그녀는 그를 '가족'이라는 범주에 담아놓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요소가 결여된 그의 세상에선 그녀는 단지 '장해물'이고 아버지는 그의 세상을 온전하다고 거짓 증명해주는데 이용될 뿐이다. 서로에 대한 가시 돋친 행동들이 결국 그를 상처 입히기도 했다. 여기서의 상처는 피부에 난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문드러진 동심만이 남아있었다.


미성숙은 그의 무기이자 약점이었다. 물렁한 때는 쉽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만큼, 그 어떤 것이라도 거침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중요한 때에 그녀는 어떠한 따스함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모양은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과도 상태에서 흐려져버린 그의 순수함은 그를 순수악으로 이끌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행해지는 정도가 심한 장난들은, 귀엽다기보단 섬뜩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깨져버린 가족이란 범주에서 서로가 아직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익숙함'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것과는 달라. 엄마도 나한테 익숙하잖아.'라고 그녀와의 관계에 깊은 선을 그어버린다. 좋아할 때에는 자신의 손이 먼저 나가 상대방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그 손짓의 엇갈림이 계속되면 익숙해지게 된다. 그들에게 익숙함은 '독'이었다. 관계의 발전에 분명한 장해물이다. 그들에게 변화가 없는 것은 '안정의 지속'이 아닌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멀어질 뿐이었다.


우리들의 많은 관계에서도 이러한 '익숙함'은 존재한다. 그것은 일종의 '포기상태'의 누적이다. 불편함이 갖고 있는 뾰족한 불편함이 무뎌져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찔리던 곳에 단단하게 굳은살이 생겨버린 것이다. 물론 익숙함이 친근함의 표현으로 치환되어, 그것 그대로 편안해질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노력이 없는 한 언젠가 그것은 굳은살을 뚫고 깊숙이 들어와, 응어리진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서의 상대방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나 스스로에게 행하는 변화의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의 익숙함은 이미 깊게 뿌리내려 고칠 수 없는 것이 돼버렸다. 때문에 그녀와 그가 했던 외출은 늘어진 테이프를 다시 감아보았을 뿐, 나오는 소리는 여전한 소음이었다.


생각할 시간은 많았을 테니
이제 말해줘. 왜 그랬니?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초적인 질문 하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영화의 맨 처음에 놓였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라는 단순한 물음은 모든 것이 명확해져 그것이 검붉은 현실로 드러났을 때야 등장했다. 그 질문은 그에게 던져졌을 뿐만 아니라, 영화 밖의 우리에게까지 그 떨림이 전해진다.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이 '누구 때문'이 아닌 '왜'라는 것이다. 덕분에 대답은 여러 갈래를 만들게 된다.


누구라는 질문은 답을 한정한다. 그 아니면 그녀, 어쩌면 관계의 사이에 놓여있었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하게 한다. 그녀의 결여된 모성애로 시작된다면, 왜 그녀에게서 그것이 결여 됐는지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케빈 이전의 삶에 대해 얘기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도 또 왜라는 질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출발한 '왜?' 또한, 분명 영화는 그의 탄생부터 그려졌지만, 그가 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쉽게 이해않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던 가끔의 그녀를 향한 갈망이 남아있고, 영화의 마지막 눈녹듯 사라진 그의 경계심은 또다른 물음표를 짓게 한다. 영화가 보여준 모든 상황들은 일어난 사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주는 듯 하지만, 막상 그녀의 '왜?'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엔 섣불리 답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질문에 이어진 케빈의 대답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이다.




어쩌면 그 대답은 '인간'이라는 포괄적이면서도 간단한 답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기에 생명을 탄생시켰고, 인간이기에 '개인'의 경계를 지키려 했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이기심에 악한 감정을 느끼고, 인간이기에 사랑을 원했고 빈 대답에 화가 난 것일 수도 있다. 그와 그녀의 관계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배척되어야 하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포옹이 묘한 괴리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잔향을 전해준다는 데에서, 그들이 보여준 타락과 분노, 괴로움, 두려움들이 인간이란 존재가 갖고 있는 요소란 것을 확실히 해준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왜?'라는 질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그 원초적인 질문을 쉽게 간과해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스로의 행동에 '왜?'라는 질문을 덧붙이는 것은 위험한 모험일 수도 있다. 그 질문의 끝에는 결국 현재의 모습을 부정하는 대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대답을 찾지 못했을 때 생기는 괴로움을 떨쳐내지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분명 우리 스스로를 알아가기 위한 첫걸음이고, 그들의 처음에는 결여된 것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의 답은 간단할 수도 평생 살면서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단, '왜?'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여러 이유를 더하면서, 동시에 인생에 여러 의미를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케빈에 대하여' 그리고 '나 스스로에 대하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꾸던 소년을 구할 주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