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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an 11. 2017

'순수한 욕망'과 '공감'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찾은 '나'를 찾는 '순수한 욕망'

'욕망'은 '순수함'의 이면이다


앞선 문장엔 은연의 이질감이 담겨있다. 욕망이란 단어와 순수함이란 단어는 어쩌면 전혀 다른 색으로 그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검은색이나 빨간색 어쩌면 둘을 섞은 탁함이 가득한 검붉음으로 그려질 수 있다. 반면에 순수함은 그 어떠한 부산물이 존재하지 않은 맑고 투명함을 가득 담은 모습일 것이다. 두 개의 단어는 분명 같은 방안에 놓일 수 없는 단어이다. 한 단어가 추구되기 위해선 다른 단어가 색을 잃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현실의 우리들에게 대입시켜 본다면, 같은 곳으로 향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에 치여 하루하루를 앞다투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욕망'은 희생되어 사라지며, 마냥 추구되기는 힘든 모양새다. 누군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이성적이지 못하고 철이 없다고 판단되기도 한다. 덕분에 우리들의 욕망은 점점 옅어져 그 탁한 색을 버리고 '순수함'과 같은 순백색과 가까워지게 된다. 그렇게 '욕망'은 자신의 색을 버려가면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습으로 형태를 바꿔 점점 그 짙은 색들은 지워져 간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워져 거의 투명하게 되어버린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마저 저버리지 못하는 딱하나의 색이 남는다. 바로 그것은 '나'라는 색이다.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그 순수한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해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인생이란 길을 꾸민다. 물론 그 길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대답을 원하던 사람들을 다룬 영화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치카와 준' 감독의 '토니 타키타니(トニー滝谷)'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공백을 채우고 싶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과 '순수함'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잘 그리긴 하는데, 체온이 안 느껴져


'토니 타키타니(잇세이 오가타 분)', 그의 이름에 담겨있는 두개의 나라는 그 스스로를 그 어느 곳에도 놓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인간'의 존재로 살고 있었지만, 그의 삶에서 인간의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태어나며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키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악단을 이끌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가족, 친구, 그리고 사회로부터 배제된 그에게 남은 것은 어릴 적 흙 놀음의 연장선인 그림뿐이었다. 그런 그의 그림은 '체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삶에서 마치 '인간관계'라는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구성요소인 '외로움'이나 '고독'조차 없었던 것처럼, 그의 그림은 '체온'이 존재하지 않아 '차갑다'라고도 느껴지지 않은 것과 같았다.


어린아이에게서 초콜릿을 멀리해야 할 시기는 그 아이가 처음으로 초콜릿의 맛을 본 순 이후이다. 그의 삶은 고독과 뜻을 같이했다. 온전히 자기 자신만으로 채웠던 그의 세상에선 어떠한 공백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존재를 꽉 채워 완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생명력을 잃은 비좁은 관 속 한구의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목표를 잃은 작은 배가, 망망대해에서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삶은 여유보다는 현실이란 파도에 휩쓸리며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린 모습이다.


우리들이 마치 '나'라는 존재를 찾겠다는 것에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그러한 노력과 시도는 없었다. 물론 이것이 표면적인 불편함이나 필연적인 변화를 포함하진 않는다. 영화 속 그도 체온이 없는 그림 기술로 직장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사회라는 구성의 한 부분에 안착해 있는 것으로 우리들은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 현실적인 조건들을 마감재로 사용한 딱딱한 벽들로 둘러싸고 안정적이다고 느끼는 것이 현대사회에서의 우리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것은 흔들림이 없기 때문에 강한 바람을 맞는다면, 유동적이지 못해 바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의 삶에는 '사랑'이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옷은 말이죠. 자기 안에 부족한 부분이 있잖아요.
그걸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에게 다가온 '코누마 에이코(미야자와 리에 분)'는 그의 비좁고 어둡던 세상 속에 한줄기 빛이 되었다. 그에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의 삶은 그제야 그 순수한 욕망을 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의 욕망에 철저히 맞춰 살고 있었다. 그녀는 '옷'이란 수단을 통해 자신의 원초적인 욕망을 채우고 있었고, 곧 '옷'을 사기 위한 '돈'으로 욕망을 전가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바로 사람의 삶의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은 '원'을 그리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욕망'이란 단어로 중간중간을 묶어, 그 끝에 '나'라는 매듭을 지을 수 있도록 한다. 그녀가 '나'라는 존재를 위해 '옷'을 사고 '돈'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나타낼 무언가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욕망의 색이 아무리 옅어졌다 하더라도,  이어본다면 어쩔 수 없이 현실 언저리에 놓인 포기할 수 없는 탁함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곧 '옷'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삶에서 아무리 완벽한 원을 그려냈다고 하더라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것은 타인과 연결된 어느 부분에 의해 그물처럼 퍼져있을 것이다. 그리고 토니 타키타니의 삶과 그녀의 삶을 묶은 그 근방에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그렇게 많은 옷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통해 그물에 구멍을 낸다. 그녀는 결국 여러 갈래의 선 중에서 자신의 것을 끊어버리기로 한다. 그녀가 옷을 사지 않게 되면서, 그녀의 원은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죽음'과 같았다. 토니의 원초적인 욕망은 '그녀'만으로 채울 수 있었지만, 그녀의 원초적인 욕망을 대체했던 '옷'이 만들어낸 구멍을 그녀는 쉽게 메꾸지 못했다. 그녀를 기다리던 것은 곧 '죽음'이었다.


즉,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는 삶은 곧 '죽음'과 같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녀가 물리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이전에 이미 그녀 스스로는 죽어있는 상태였다. 차 안에서 환불한 옷을 생각하느라 사고를 당하게 된 그녀는 마치, 자신의 텅 빈 모습을 마주하고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과 같았다. 이후 찾아온 그녀를 잃어버려 '나'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 토니 또한 죽지 못해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의 욕망의 단계는 단순했던 만큼 더욱 영향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가 생각한 방법은 그녀의 잔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예전 그 방에서 아내가 남긴 옷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그 여자를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그 여자는 잊히지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넓은 옷방과 그곳을 가득 채운 부인의 옷들이었다. 그녀가 차마 환불하지 못한 수많은 옷들은 그녀의 그림자로 남아, 그의 그리움에 자꾸만 불을 지폈다. 그리고 토니는 비어있는 대상이 보여주는 그림자의 괴리에 다른 사람을 채워 넣는 것으로 고통을 해소하려 했다. 그렇게 오게 된 '히사코'는 그가 안내해준 그녀의 방으로 가 옷들을 입어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은 행복도 슬픔의 농도도 아니었다. 동정과 연민에 의해 떠밀려 나온듯한 눈물이었다. 남기고 간 그 수많은 옷들로도 채우지 못하던 에이코의 내면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발버둥이 하나하나 옷이 되어 그녀의 옷방을 가득 채운 것이다. 하지만 그 끊어진 고리 앞에서 죽어버린 그녀에 히사코는 '공감'을 한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각자의 원에 달려있는 욕망이란 고리는 '공감'이란 작용을 통해 타인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밖 우리들의 사회에서 해소되지 않는 많은 문제점들은, 이러한 공감이라는 작용을 통해 해결 가능한 창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곧 단체가 아닌 '개인'을 범주로 놓고 보더라도, 큰 힘이 되기 마련이다. 그녀가 해주었던 공감의 모습은 그대로 토니에게 전달되어졌다. 에이코의 텅 빈 자아를 히사코는 느낄 수 있었고, 에이코를 그리워하던 토니와 같은 곳에서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그를 찾아갔다. 그 또한 그녀를 다시 찾는다. '공감'이란 열쇠는 서로의 삶에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다음 장면엔 고통보단 희망이 있을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나'라는 존재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사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는 분명 단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사회의 요구에 따라 맞춰 '남'들보다 뛰어난 누군가를 목표로 살기 마련이고, 그것이 곧 '나'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해 자아를 잃어버리는 과정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 순수한 욕망을 채워나갈 자신의 것을 하나씩 품지 못한다면, 곧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삶이란 것을 영화는 말해주었다. 평범한 것 조차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하여, 평범을 목표로 삼는 것은 삶의 색을 흑백으로 만드는 것이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독의 색으로 짙게 물들었음에도, 마지막에 희미한 미소를 짓게함은 분명 그가 끝까지 자신의 '순수한 욕망'에 충실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두었던 현실의 조건들에서 벗어나 '나'를 찾는 것이 완전한 삶의 방향이다. 그것이 물론 무섭고 힘들고 때론 비이성적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사회가 만들어낸 틀에서 벗어 나길 원하는 생명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이 타인과 함께 놓여 있는 세상에서 공감이란 힘을 발휘한다면 분명 '나'라는 존재에 대한 순수한 욕망을 채워나갈 다채로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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