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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an 20. 2017

'소통'에 대하여

영화 '컨택트'에서 찾은 '소통'이라는 열쇠

※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통


현대는 '소통'이라는 요소의 가능성이 매우 열려있다. 발전해나가는 IT 기술력과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소통이라는 것을 쉬운 것으로 만들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한정된 곳에서만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삐삐 세대를 거쳐, 휴대폰, 그리고 지금은 어디서든 얼굴 보면서 서로 얘기할 수 있게 된 스마트폰까지. 그 소통의 창구는 점점 넓어져 이젠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것조차 힘든 일이 되어버린 듯싶다. 하지만 언제나 인간은 소통을 도구로 사용할 것이고, 이를 통해 계속 발전을 도모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발전할수록 사람 간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것이 곧 모두와 소통하는 세계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재'라는 단어로 유행에 오른 '세대 차이'라는 시간적인 차이에서 오는 문제와, 인간이 각자 갖고 있는 언어적인 차이, 그리고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생각의 차이가 소통에 장해 요소로 작용하곤 한다. 그런데 앞선 소통에 대한 것을 말할 때 전제되어 있는 조건은 바로 '인간'대 '인간'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 우리 '인간'과 '동물'과 같은 다른 종족 간에도 소통이 가능한 부분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동물과 '교감'을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 지구라는 땅 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인간과 다른 종족들과의 소통은 무리가 없을 듯 보인다.


여기에 상상력을 조금 더해 만약 '외계인'이 온다면, 우리 인간 사회는 어떤 소통을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드니 빌뇌브'감독의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에서는 외계의 '무언가'와 접촉하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과연 영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그들과의 접촉은 어떤 식이며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리고 그것의 과정에 놓인 주인공들은 어떠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지 살펴보자.



지구 곳곳에 이상한 물체가 나타났다. 동시에 나타난 12개의 큰 물체는 지금껏 지구에선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은 혼란에 빠졌고, 주인공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애덤스 분)'는 언어학자로서 그들의 언어를 분석해달라는 군의 의뢰를 맡는다. 그리고 외계 우주선이 놓여있는 몬태나 주로 가면서 이론 물리학자인 '이안 도널리(제러미 레너 분)'을 만나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인사보단 그녀가 쓴 책의 서론을 읽어준다. 그것은 '언어는 문명의 기초이다.'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이안은 이렇게 말하며 반박한다.


문명의 초석은 언어가 아닙니다. 과학이죠.


우리 사회에서 언어와 과학은 맡은 바가 다른 분야로 느껴진다. 때문에 그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인간 문명의 근간에 두느냐라는 질문에 언어와 과학 두 가지의 대답으로 나눠지곤 한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발전은 당연히 과학적인 면이 눈에 먼저 띄기 마련이다. 어릴 적 그려왔던 과학상상 만화 그리기에서나 나올 법했던 것들이 현재는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 우리들의 삶을 편하게 해주고 있다. 그에 반해 언어라는 것은 새로운 유행어가 생겨나고 또한 사라지기도 하며, 변천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분명 과학보다는 변화의 모습이 더딘 것은 사실이다.


결국 우리의 초점은 과학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이안의 말을 부정하기엔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더라도, '과학'이 '언어'보다 더욱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언어에 둘러 싸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을 초점으로 시작한다면, 가시적인 '발전'이라는 점보다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변화'라는 결과를 내야 한다는 것에서 나오는 막연함이 언어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루이스와 이안은 군인들과 함께 외계인 헵타포드와 만났다. 루이스는 두려움에 떨었고, 이안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조금은 상기되었다. 둘은 같은 곳을 향했지만 물음표를 띄우는 곳은 분명 달랐다. 이안은 그들이 어떻게 빛보다 빨리 왔는지나 어디에서 왔는지라는 과학적 질문의 답을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원했다. 그녀가 청각이 아닌 시각적인 문자 표현으로 그들과 첫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를 감싸고 있던 모든 두려움은 씻겨져 내려가고 그 가능성에 밝게 미소를 보였다.


그들은 이어서 '문명의 초석' 논란에서 '과학'이 아닌 '언어'가 우선시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루이스와 이안은 서로의 몸에 걸친 과학적으로 보호받는 것들을 벗어던지고,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가 그들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며 외계인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 장면은 영화 '패치 아담스'에서 다른 의사들 모두가 환자의 의학적인 상태에 대해서 궁금해할 때 혼자 환자의 이름을 궁금해하던 주인공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세상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정확한 과학적인 정보가 더욱 큰 힘을 가지는 것은 맞지만, 그 가운데에 살아 숨 쉬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놓여져 있어야 한다라는 것을 영화는 말해준다.


영화는 순조롭게 그들과 소통하며 일을 진행해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주인공 일행이 그들과 소통을 진행하는 와중에, 다른 곳에선 혼란의 도가니가 펼쳐졌다. 루이스와 이안은 이미 그들과 소통을 하며 벽을 하나씩 허물고 있었지만,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순종적이지 않았다. 어느 곳선 대규모 시위가, 어느 곳선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 절대자에게 숭배를, 또 어떤 곳선 이성을 잃고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영화에선 '인간'과 '외계인'으로 한정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현실 사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선 외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들의 반응과 다르지 않다. 주인공들의 일행처럼 대화를 하고 소통을 시도하며 이해하려고 하거나, 어쩌면 서로를 적대시하고 자의 인간관계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 비록 주인공의 시점에 맞춰져 있었지만, 혼란스러워하는 세상의 모습이 이해되는 것은 앞서 말한 두 가지 모두의 방법이 사회에서 통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의 섣부른 판단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쪽이 문을 아예 닫아버린다면 반대쪽에서는 열수 없는 것이 소통이다. 소통의 목적은 서로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향해 함께 서로 도우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대며 한쪽이 무너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중국은 외계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그들이 생각한 소통의 방법은 승패가 결정되는 '게임'인 마작이 되었다. 한쪽이 이긴다면 한쪽은 반드시 지게 돼있는 그 시스템을 루이스는 심히 우려하며 올바른 소통의 방법이 아님을 말해준다.


불완전한 소통에서 나온 외계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각국의 의견 차이로 시작한 불신은 서로를 정보 공유마저 하지 못하도록 하고 각자 군사적인 대비를 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인간' 대 '외계인'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영화에서 주인공 일행이 맞이한 최대의 적은 모습도 언어도 다른 외계인이 아니었다. 바로 같은 지구에 있었던 소통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이었다.



'불통의 세계'는 그들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본 루이스만이 희망을 보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드는 그들과 포기하지 않고 소통하길 원하는 루이스의 모습은 낯설지만은 않은 모습이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소통'을 답으로 내세워 그들을 구해내려 하고 있었다.


우리의 세상을 살펴보자. 같은 세상에서 같은 언어를 쓰지만 분명한 벽이 존재하여, 우리들의 목소리가 닿지 않고 있다. 이러한 불통의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같은 목적 아래,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의 세상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버렸고, 서로서로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갈 때이지만 어느 한쪽은 잘못된 길을 걸으며 상대를 적으로 돌려버렸다. 벽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진실'과 '정의'가 아닌 '물질'과 '욕심'을 추구하며 불통의 세계를 만드는 것은 결국 영화에서 루이스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루이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들과 대화하려고 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것은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보다 더 기본적인 곳에 놓여있는 요소였다. 세상이 무서운 자들은 벽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광장을 가득 채웠던 외침이 있었고, 과학적인 발전이 아닌 체계의 변화를 끊임없이 원하고 있다. 지금 그 이제 뽑혀나가야  썩은 뿌리와 소통을 막고 있는 불통의 벽이 점점 힘을 잃고 있다. 혼란한 세상을 구해내기 위해선 루이스가 그리고 우리가 '소통'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들 차례이다.




영화는 초반 '처음과 끝이 무의미해졌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 사이 담겨 있는 '내용'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다. 외계인들의 언어가 둥근 모양인 것에서 처음과 끝을 정할 수 없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의 원 모양의 문자 안에는 의미와 뜻이 담겨 있었다. 즉 '처음'과 '끝', 인간의 범주로 보았을 때는 '탄생'과 '죽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 한정된 순환의 고리 안에 우리가 어떠한 내용을 채워 넣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는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과정 사이에 놓여있다. 영화에서 루이스는 우리보다도 더 처음과 끝의 의미가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우리에겐 그녀의 삶에 놓인 무게만큼의 어떤 것이 놓여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앞으로의 삶에 색을 더해나가는 것처럼 우리 또한 어떤색이로든 우리들의 삶을 채워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외계인들과 했던 '소통'의 과정은 그녀의 딸 '한나'의 것과 다르지 않았고, 그것들 과정 하나하나는 그녀의 삶에 의미로 남게 될 터였다. 우리의 인생 안에도 타인이 존재할 것이고 그 사이를 '소통'이라는 끈으로 연결해 앞으로의 인생이란 여행을 나아갈 것이다. 그 사이 그녀가 보여준 의 자세를 우리도 할 수 있다면,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찬 의미 있는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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