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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Mar 15. 2017

꿈을 재촉하려 한다면

영화 '프랭크'에서 찾은 참된 '꿈'의 의미

가고 싶은 길,
가야 하는 길,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길...

다 다른데 어떡하죠?


from 블로노트


 우리들의 삶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빛이라고 믿는 어딘가에 있는 등대를 찾아 하루하루 힘겹게 노를 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바다는 변덕스럽기 마련이다. 예상치 못한 폭풍우가 칠 수도 있고, 기대하지 않은 화창한 날씨가 당신을 맞이해줄 수도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우리는 때론 온전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곤 한다.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이 그려놓은 항해로를 벗어나 꿈꾸었던 과거의 그것과 다른 색을 쫓게 되기도 한다.


 가고 싶은 길이 너무도 험해 가고 싶지 않은 쉬운 길로 들어서거나, 또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 그 빛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색을 갖고 있다던지, 어쩌면 여린 두 손이 거센 물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앞서 나가는 것을 보고 불안에 떨기도 하고, 나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이정표를 잃어버린 채 인생이란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남겨질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들의 인생은 수없이 많은 선택지들 가운데 어디로 어떻게 어느 속도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이 질문들을 마음속에 품고 빛이라 믿는 것을 쫓는 사람들이 있다.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영화 '프랭크(Frank)'에서는 음악을 하고 싶지만 재능의 부재에 고민에 빠진 한 남자와, 반대로 재능이 너무 넘쳐나 주체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난 뭐든 숨기는 게 싫어
감출게 뭐 있어, 안 그래?


 '존(돔놀 글리슨 분)'은 꿈을 꾸는 청년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면 '음악'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에겐 선천적인 '재능'이 없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영감이 될 수 있다는 것에서 보이는 장면으로 가사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멜로디이거나 다른 노래의 것과 같은 모양이 되어버린다. 이런 그에게 우연히 만나게 된 '프랭크(마이클 패스벤더 분)'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큰 인형 머리이다.


 그는 재능이 넘쳤다. 존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지만, 느끼는 바는 전혀 달랐다. 그의 안에선 분명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이 있었지만, 프랭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기보단 끊임없이 그것과 싸우는 느낌이었다.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 쥐어 짜내듯 곡을 만드는 그의 방법은 우아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았지만, 존이 느끼기엔 분명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음악 천재의 모습이라고 느꼈다. 때문에 '존'은 '프랭크'가 되고 싶었다.


 우리들 또한 존과 같을 수 있다. 그 누구와 같고 평범한 특별한 것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제일 어울리는 그런 사람 말이다.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것에 대해서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할 것이다. 그건 욕심이 아닌 꿈을 이루는 기본 요소 중 하나의 모습이다. 눈을 감고 '꿈을 이룬다면' 이란 조건으로 시작한 상상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뿐이다. 그 길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것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꿈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갈 때 당당해질 수 있다. 때문에 프랭크는 인형탈로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것과 반대로 자신의 기괴한 성적 경험을 곁들어 '난 뭐든 숨기는 게 싫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어쩌면 '프랭크'이기에 가능한 말이 되었다. 하지만 존은 달랐다. 그가 프랭크의 재능을 부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몰래 그들의 행보를 인터넷에 올리고 있었고 그것이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 바람이 그들을 어디로 보낼지 몰랐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타협하는 게 어떨까요?


 그들은 권위 있는 텍사스의 음악 축제에 초청받게 되었다. 존이 올린 영상을 보고 프랭크의 밴드에게 제안을 해온 것이다. 프랭크는 2만 명이 넘는 조회수에 설레어하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준다는 자신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기분을 느꼈다. 그는 프랭크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조회수'에 있다고 생각하고는 영상을 계속해서 올리며 그를 꿈에 다가가도록 계속해서 부추겼다. 하지만 프랭크는 곧 그것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이 아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라는 것을 눈치채고,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은 프랭크에게 '타협'을 제안한다.


 그 타협은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이 원하는 것'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의 우리가 수없이 해온 타협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언젠가 순수한 마음으로 적어냈던 '장래희망'은 철없을 적의 상상이 되어버렸고, 많은 현대인들의 꿈은 '취업'과 같은 무미건조한 것이 되어버린 듯했다. 애써 꿈을 지켜왔더라도 현실과 타협하여 돈으로 직결되는 직업이 되어버리고, 씁쓸한 현실 속에서 '남들도 다 그렇지 뭐'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게 전부인 듯싶다.


 존도 그러했다. 남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적인 영상을 올렸고 프랭크가 음악을 바꾸게도 만들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내버리고, 프랭크만을 내세워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했다. 그것이 그의 타협점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밴드'와 '자신의 노래'를 잃어버린 프랭크에게 꿈을 재촉했다. 마치 세상이 우리에게 그랬듯, 우리가 원하는 것은 원래 이런 모양이었다는 듯이 '현실'을 내보여준다. 그렇게 그것이 진짜 꿈인 줄로만 알고 맞이한 무대에서 프랭크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의 꿈이 아니었기에, 그는 무대를 가득 채운 공백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타협한 꿈'을 이루었을 때 느낄 그 허무함을 프랭크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것이다.


너희 모두 사랑해.


 자신을 잃은 프랭크는 존과의 다툼에서 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형의 얼굴마저 잃게 된다. 후에 존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프랭크에게 그리고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 사과를 구하지만 그들은 받아주지 않는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게 된다. 프랭크의 꿈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존이 없는 그 밴드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바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던 '자신의 꿈'을 향해 순항을 나서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존과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불안에 떠밀려 타협점을 찾고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 기준을 맞추고, 맞춰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꿈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현실의 틀에 맞춘다. 그렇게 도달한 끝은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란 걸 영화는 말해준다. 텅 빈 바와 미소를 남기고 떠난 존의 빈자리를 채우는 그들의 음악은 꿈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든 이를 위로하는 듯했다. 꿈을 향해 재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빈 술집이어도 괜찮다. 자신이 순수하게 그려내던 빛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최근 이슈가 된 한 소년이 생각났다. 몇 해 전 유명 오디션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기 자신의 꿈을 보여줬지만, 심사위원들에게 철저하게 무시되고 몇 년 동안 놀림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잊고 바쁘게 살다가 익숙한 얼굴에 살펴보니 바로 그 소년이었다. 자신을 향해 비웃던 그 세상을 향해 다시금 도전을 내보인 것이다. 그에게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나는 하지 못한 그것을 그 소년은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에 짧은 응원을 남기며 내심 그가 부러웠다. 그 소년은 여전히 자신이 꾸었던 그 순수한 꿈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는 타인의 시선과 현실의 조건 그 어떠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잔잔히 나아가고 있었다. 텅 빈 객석을 상대로 노래를 하는 프랭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 인생의 항로는 어느 빛을 쫓고 있는지. 그 어떠한 색이라도 좋다. 다만 그것이 현실의 조건을 너무 더해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화는 위로와 응원을 해준다. 포스터의 한 문구가 이 영화를 요약해 주는 듯하다. 그 문장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우리존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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