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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Mar 24. 2017

'추락' 아닌 '안착'

영화 '미스 슬로운'을 보고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단어는 힘을 갖는다


 단순히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뿐만으로도, 단어에 들어있는 속성에 타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일본에서 은둔형 외톨이를 뜻하는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은둔형 외톨이'는 문제 인식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순한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그렇게 단어는 인식 과정에서의 경계심을 지우고 무의식적인 동의를 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리 잡게 된 단어는 체계를 만들게 되고, 한 개인이란 존재는 체계라는 거대한 단어 안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 매든' 감독의 영화 '미스 슬로운'에서는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여자 주인공을 통해, 그 거대한 체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정들을 보여준다. 타인에게 원하는 의견을 이끌어내기 위해 논리적인 설득을 하는 모습은 멋져 보일 수 있지만, 유능한 로비스트로 알려진 그녀에겐 매일 하루하루가 전쟁과 다를 바 없었다.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은 유명 로비스트이다. 의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기 위해 그녀를 고용하고 그녀는 자신의 '신념'이 향하는 곳으로 움직였다. '총기 규제'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도와달라는 의원을 슬로운은 거절한다. 그리곤 총기 규제를 찬성하는 쪽으로 힘을 쏟겠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것에, 그녀의 과거를 조심스럽게 물으며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표한다.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음을 영화는 그대로 보여준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선택은 곧 이익과 손해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때문에 신념이란 단어는 실질적인 이익과 손해의 관계 사이에서 무색하게 되어버렸고, 누군가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면 거기에 '왜?'라는 질문을 붙여가며 합리적인 이유가 될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곤 한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라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현실의 조건들에 치여 타당성을 잃어간다.


  하지만 슬로운은 달랐다. 그녀는 단지 '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일하고 있던 회사를 박차고 나와 반대편에 섰다. 예산도 적고 상황도 불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계산과정 없이 단지 그녀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분명 그것은 현대인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행동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믿고 있었기에 과감히 행동할 수 있었다. 본인에 대한 신뢰는 미래에 대해 불안과 걱정을 먼저 하게 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바로 '감정'이었다.



  슬로운은 냉철한 이성과 탄탄한 논리력으로 상대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녀가 무기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여기서의 감정은 '자신의 감정'이 아닌 '타인의 감정'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에스미(구구 바샤-로)'의 과거사를 이용해 그녀를 감정적으로 만들었으며, TV에 나온 그녀의 감성으로 가득 차오른 모습은 그 어떤 논리적인 주장보다 호소력 있었다. 그것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슬로운을 알고 있었기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들어 에스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감정이 강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슬로운 본인 스스로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녀는 빈틈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차가운 마음을 갖게 된 것이었다. 감정이란 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감정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감정에 충실하여 살아가는 것은 앞으로 달려 나가기에도 급급한 현대의 젊은이들에겐 사치를 부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슬로운식 삶의 방식은 한마디로 '소모적'이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지만, 쌓아 올린다는 느낌보단 한두 가지씩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 강했다. 에스미도 결국 슬로운을 떠나갔고, 슬로운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았다. 그것이 차갑게만 느껴지는 현대인들에게는 최고의 방식이 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녀가 무너졌을 때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에서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영화는 말해준다. 그렇게 그녀는 무너진 밑바닥에서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다.



  결국 그녀가 원하던 것은 무엇인가. 약을 먹으면서 잠도 자지 않고, 주변 모든 사람과 물건을 경계하는 삶은 이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의 '성공한 로비스트'라는 이미지 뒤편에는 사방에서 목을 옥죄여오는 숨 막히는 일상이 놓여있었다. 높은 곳에 오를수록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높은 곳에서 결국 그녀는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녀가 떨어지는 모습은 '추락'이 아닌 '안착'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위태로운 꼭대기에서의 삶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쌓아온 것을 과감하게 무너뜨리면서 그녀가 원하던 것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감정'이란 것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밀어냈던 감정을 위해서 그녀를 있게 한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전면 부정했다.  자신의 신념이 아닌 타인의 시선과 손가락만을 신경 쓰며, 신념이 결여된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시스템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로비스트 살 수도 없게 될 것이고, 교도소까지 가게 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 무엇도 무섭거나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삶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그녀는 교도소 복장 안에 여유로움을 담았고 그것은 그동안 그녀를 옥죄였던 냉혹한 현실으로부터의 탈피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영화 초반 잠에서 깨어나는 그녀와 버려지는 약들. 그녀가 괴로워했던 이유는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서가 아닌 지켜주지 못한 에스미의 마음과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구치소에서 나오는 그녀에겐 많은 현대인들이 잊고 사는 여유와 감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삶은 이제 공백으로 가득 찼지만, 그것은 허무가 아닌 앞으로 채워나갈 다채로운 감정을 위한 빈자리였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체계에 대한 개인의 도전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차갑고 인간이란 존재는 더욱 무력하다. 현재 젊은이들은 'N포세대'라고 불리며, 그녀가 힘들게 찾은 감정들을 잊어버린 채 무미건조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 올바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우리가 해야 할 단어의 경계는 '여유'와 '휴식'과 같은 것이 아닌, 'N포세대'라는 거대한 단어이다. 'N포세대 니깐 괜찮아'가 아니라, 'N포세대라는 단어는 안돼'라는 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체계에 대한 단어를 경계가 아닌 적응을 하는 것으로 태도를 취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변하지 않을 앞날과 악순환의 고리일 뿐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을 생각해보자. 사랑, 연애, 친구, 휴식, 여유, 미래, 꿈. 현실이란 조건으로 지워버린 그것들은 슬로운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것이다. 그것들을 마음에 품지 않고 앞만 보면서 달려 도착한 결승선에서 뒤를 돌아본다면, 흘러간 시간에 무색하게 놓인 텅빈 가치들의 허무함뿐일 것이다. 나중이란 말은 미래의 나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잃어버린 감정들은 외면당한 채 현재에 놓여 언제든 돌아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에서 그것들을 위한 자리를 조금씩 마련한다면, 훨씬 아름다운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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