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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May 04. 2017

텅 빈 손, 그리고 신뢰의 매듭

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를 보고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할까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몇천에서 몇만 단어를 내뱉는다고 한다. 그 많은 단어들을 병에 담아 본다면, 그 엄청난 무게에 경외심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 병 안에서 '자신의 말'은 얼마큼이나 될까? 우리는 많은 단어들을 내뱉지만 그 단어들의 중에는 분명 나의 속의 것이 아닌, 목구멍을 올라오는 과정에서 현실의 조건과 시선에 본래의 표정을 잃은 채 전혀 다른 가면을 쓰고 나오곤 한다. '괜찮아?'라는 질문에 자신을 버팀목으로 삼는 많은 것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당연하듯이 '괜찮아.'라고 대답하는 현대인들의 씁쓸한 대답처럼. 그 경직된 단어 선택의 과정 뒤에는 딱딱하게 굳어져 자신의 목소리는 그 좁아진 구멍에서 나오지 못하고 연신 입 아래를 맴돌 뿐일 것이다. 바로 영국의 '조지 6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톰 후퍼' 감독의 2011년 작 '킹스 스피치'에서는 말더듬이였던 '조지 6세'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영국의 국왕이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화려한 왕실에 자신의 삶을 적시기엔 남들과 다르지 않은 한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 가운데 달콤함 가시로 무장된 책임감이란 무게를 손에 쥐기 위한 그의 고군분투를 그려냈다. 권력, 돈, 명예 그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은 환한 배경 한가운데, 유일한 모난 점으로 존재했던 '인간'으로서의 조지 6세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로그 : '버티' 어때요?  
조지 6세 : 그건 가족만 써요.
로그 : 좋네요. 여기선 동등한 게 좋죠.


  '조지 6세(콜린 퍼스 분)' 그러니까 그가 왕위의 계보에 오르지 않았던 '알버트 프레데릭 아서 조지'의 이름의 꼬마였을 때부터 그는 '말더듬이'였다. 그는 여러 치료를 받아보았지만, 전혀 호전되지 않았고 중요한 석상에서도 간단한 연설문 조차 읊지 못하는 조용한 문제아였다. 그렇게 수소문 끝에 찾아간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시 분)'와의 첫 만남은 순탄치 않았다. 왕족과 평민 사이는 명백한 벽이 존재했고, 그 사이 로그는 첫 대화 사이에 '동등'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사이에 '동등'이란 단어는 당연시되면서도 가벼이 여길수 없는 단어이다. 인간관계란 것이 그렇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지만, 상대를 자신과 일직선으로 잇기에는 상대방과 다른 많은 다른 점들이 곁가지가 되어 어긋나게 만든다. 자신의 삶에서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두명만 있다고 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자신의 곁가지를 잘라내지 않더라도, 거침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때문에 조지 6세의 '동등'을 내세우며 거침없이 손을 뻗는 로그에 가 달갑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손을 한탄하면서도, 선뜻 내민 손을 섣불리 잡지 못하고 경계의 눈초리를 내비치는 우리들의 현대와 닮은 모습이었다.


  로그는 차별화된 계층 사이에서 왕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까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었다.


  

겁을 먹었어, 자기 그림자에 짓눌려서.

  

  로그는 조지 6세를 치료하면서, 끊임없이 그의 마음에 다가서려 노력했다. 그가 말하길 선천적으로 말을 더듬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 원인이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조지 6세의 마음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단정한 그의 겉모습은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표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쓰이지 못한 자유로웠던 왼손과 억지로 곧음을 강요받은 두 다리가 있었다. 그는 결국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양을 하나둘씩 갖추게 되었고, 그 가운데 '자기 자신'을 하릴없이 잃어가고 있던 것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정해진 틀 안에서 목표를 강요받는다. 대한민국의 교육 과정이 그러하고, 이후의 사회에서의 역할이라는 톱니바퀴가 그러하다. 우리를 향해 두 팔 벌려 문을 열어놓았지만, 그 문구멍에 꽂을 열쇠의 모양은 하나뿐이다. 간신히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깎아내어 억지로 모양을 맞추고 이윽고 그 문을 통해 세상에 나왔지만,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할 수 있는 것'보단 '해야 하는 것'들로 가득 찬 농밀한 사람들의 시선뿐이다. 그 무게에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꿈이란 빛에서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까맣고 길게 늘어서서 우리의 발목에 매달린 현실뿐이다. 그 그림자에 짓눌려서 우리는 덜컥 겁을 먹고, 조심스레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전부인 것만 같은 현실에 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익숙해진 세상의 속도에 맞춰 고개를 숙인 채 살아가기만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조지 6세도 그러했다. 절망 속에서 꿈꿔온 이상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비난하며,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곤 회색으로 가득한 미래만을 그려낸다. 하지만 조지 6세와 로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가져야 할 자세를 말해준다.


  

그들의 절규를 듣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이야기를 들어줬죠.


  로그 그에겐 사실 정식의 교육과정도, 학위도, 박사란 칭호도 없었다. 덕분에 조지 6세는 배신감에 휩싸인다. 그를 믿은 것에 대한 후회, 그리고 나아지지 않는 자신에 대한 절망을 내세우며 비탄에 빠지며 손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고 한다. 그 가운데 로그는 말한다. 그가 했던 언어치료의 근간은 언어에 대한 지식이나, 탁월한 치료 기술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감을 주고, 이야기를 들는 것'뿐이었다.


  바로 그것. '응원과 경청'이 그가 내놓은 해결책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를 둘러쌓은 절망스러운 세상은 우리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할 수 없어'로 무장한 위축된 모습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지만, 옆에 늘어선 그림자의 끝에 똑같이 매달린 다른 현대의 젊은이의 것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대단한 무언가가 아닌, 응원과 경청은 특별한 능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로그 또한 조지 6세를 응원해주고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조지 6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은 평민 중에 그가 처음이라고 했다. 어떠한 권위도 지식도 기술도 필요치 않았던 로그가 했던 그 과정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삭막한 현실 속에서 텅 빈 손이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우리는 그 빈손들에 손을 내밀어줄 필요가 있다. 서로의 손은 맞잡고 서로에게 응원을 해주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맛있다면 '함께'라는 단어 안에 그동안 잊고 있던 '신뢰'라는 힘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조지 6세의 치료의 속도는 매우 느렸지만, 로그는 그에게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믿고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것이 조지 6세를 나아갈 수 있게 했고, 성공적으로 연설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사이의 벽은 허물어져, 진정한 친구가 되어 힘들게만 느껴졌던 세상에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었다.

  



  많은 것들을 잊고 사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소중한 것들을 바닥에 묻고는 나중을 기약하며 가볍지만은 않은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앞길에 담아놓지 않았기에 마음에 생긴 공백이 더욱 세상에 대한 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할지도 모른다. 책임감이란 고삐로, 그리고 아쉬움의 채찍으로 자신의 삶을 억지로 끌어당겨 이를 악물고 나아가는 삶이 현대인들의 초상일 것이다. 우리는 이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자신 혹은 다른 이들에게 꽤나 냉담한 시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력을 문제 삼고, 세상의 흐름과 삶의 속도를 비교하고, 삶의 완성을 강요한다. 만약 로그가 조지 6세에게 그러한 것들을 내세웠다면, 둘은 친구는커녕 주고받은 1실링 만도 못한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응원과 경청'이라는 마음속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위로와, 그것으로부터 단단하게 서로를 엮을 수 있는 '신뢰'라는 매듭이다. 그것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조지 6세가 자신의 삶의 무게 속에서 버텨 설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현실이란 매서운 바람 속에서 맞잡은 손으로 전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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