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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May 18. 2017

나쁜 놈들의 세상 속 그들과 우리

영화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을 보고

※ 영화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사람을 믿는다


  신뢰라는 것이 사람 사이에 작용할 때 그것은 매우 큰 힘을 갖게 된다. 사람을 믿는 것은 사람이란 속성이 갖고 있는 수많은 변수들이 낳을 수 있는 그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 사이의 '신뢰'라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그 순백의 힘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곤 한다. 하지만 현대에 있어서 '신뢰'라는 값어치는 점점 떨어졌다. 매일 헤드라인 뉴스에는 각박한 사회가 낳은 비참한 결과물이 놓여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온전한 사회라는 인식에 균열을 만들었고,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히게 만들었다. 과거 옆집의 문을 스스럼없이 두드리며 온정을 나눈 모습에서, 현대는 누군가의 호의는 경계의 대상이 되고 상대방과의 철저한 격리 속에서 안식을 느끼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있어서 '신뢰'라는 것은 방향을 잃었고, 굳게 닫힌 마음의 문고리를 하나씩 가슴속에 품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뢰'를 주제로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낸 영화가 있다. 바로 변성현 감독의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이 그것이다. 영화에선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남자를 통해 서로에게 내미는 손에 의미를 담아내고,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남은 세상에서 만들어낸 묘한 어긋남 속에서 이루어낸 조화를 보여준다. 신뢰라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뒷골목의 세계를 통해, 영화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각각 인물들의 입을 통해 각자의 뜻을 드러낸다. 두 남자의 만남은 한 교도소에서 시작한다.



    한재호(설경구 분)는 교도소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건들면 안 되는 놈'과 '건들어도 되는 놈'이 존재하는 교도소에서 그 기준을 정하는 모습은 그 세계 안에서 초월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에게 조현수(임시완 분)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자신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배열에서 벗어난 그런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한재호 신선함과 호기심을 느꼈고,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표정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의 조현수가 한재호의 마음에 들었다. 때문에 그는 조현수를 자신의 사람이 되길 한다.


  한재호는 쉽게 말해 '뒷골목'의 삶이었다. 조폭이라고 불리는 조직에서 그는 살아왔다. 때문에 그의 삶의 방식은 영화 제목 '불한당'에서 알 수 있듯이, 남의 것을 빼앗고 괴롭히는 것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환한 미소와 날카로운 이빨이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면전에서 했던 고운 말이 잠시 후 겨눌 총구의 밑반찬이 되는 것이 예삿일이다. 이러한 곳에서 '신뢰'라는 것은 강한 결속력과 더불어 그만큼 깊게 상처를 낼 수 있는 '무기'와 다르지 않았다.


  사람 사이에 신뢰라는 것은 그렇다. 강하게 서로에게 뿌리내려 흔들림 없이 유지시켜주다가도, 그 뿌리가 사라질 때면 깊은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 것이 신뢰이다. 인간관계 사이에서의 상처를 입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뢰'의 속성에 있다. 마음을 건네주며 신뢰를 얻는다. 하지만 그 마음은 곧 약점이 되어, 상대방이 쉽게 생각하여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자신에게 내리 앉은 '신뢰'는 세차게, 그리고 아프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결국 그 힘겨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뽑혀나갔을 땐 상처 입은 마음과, 신뢰로 가득 차 있던 상대방이 만들어낸 공백이 남을 것이다.


  때문에 한재호는 상대방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 세계에선 '은혜를 원수로 잘 갚을수록' 잘했다고 박수받는 곳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곧 스스로 먹잇감이 되는 것이기에, 그 세계에서 신뢰를 쌓기 위해선 먼저 상대방이 마음을 드러내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한 방법이 한재호의 세계에선 정상적인 방법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던 조현수를 갖기 위해 그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현수의 경찰과 조폭의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은 양쪽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조현수는 그러지 못했다.


  

  

  조현수는 경찰과 조폭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조절하며, 중요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실상은 철저히 정보로부터 격리되었고, 양쪽의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참히 이용되는 희생양일 뿐이었다. 각각이 내세우는 '이쪽 세상의 법칙'에 따라 그는 자신의 역할을 강요받고, 그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둔갑하여 점점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필사적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장구를 칠 수밖에 없게 된 조현수였다. 항상 연기를 하며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의심의 날 위에 꽃 피운 신뢰는 재호와 현수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때문에 현수는 재호에게 묻는다. "이렇게 사는 거 안 지겨워요?"라고. 법과 정의에서 밟고 있던 땅이 아직 익숙했던 탓인지, 어쩌면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그들의 세상 속에 놓인 한재호가 진심으로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한재호는 대답한다. "이렇게 살려고 사는 게 아냐, 살려고 이렇게 사는 거지." 그것은 불한당의 삶인 그뿐만이 아닌 우리들의 삶을 대변하는 문장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 모습에 우리는 '지겹지 않냐'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답은 재호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불한당이기에 '이렇게 사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기 위하여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고, '쳇바퀴 같은 삶'이 변함없는 삶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돌아가는 쳇바퀴 속 각자의 가능태를 빛나게 하기 위해 갈고닦는 노력의 현장으로 비춰줄 것이다. 재호의 단어들은 곧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가 되며, '그러니까 괜찮아'라고 말을 덧붙인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가까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신뢰'는 '진실' 앞에서 점점 무너지게 된다.



  조현수는 한재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한재호가 현수 이전에 자신의 손에 쥐었던 마음들은 가시가 돋쳐 함부로 대하다간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남기는 그런 탁한 피가 흐르던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현수가 보여준 것은 정말로 순수한, 온전히 자신을 믿는 '신뢰'의 결정체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여느것과는 달랐다. 어릴 적 그의 불우한 과거사로부터 시작된 삶의 모습 속에서 그가 평생 동안 갖지 못한,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텅 빈 마음속 온갖 탁한 것들로 채워 넣었던 구멍의 본모습을 현수에게서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현수가 진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과 같이 마음속 한구석에 구멍이 생기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이 되어버릴 것이었기에. 현수의 삶이 자신의 것과 동일시되는 순간부터 한재호는 조현수에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결국 그는 조현수의 시선에 자신의 마음을 두게 된다. 때문에 자신과 함께 오랫동안 일했던 동료도 거침없이 제거해버리고, 현수에게 몇 번이고 총구를 겨누고 쏠 기회를 얻지만 결국 쏘지 못한다. 그것은 곧 자신이 잃어버린 모습에 총을 겨누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재호의 죄책감은 자신이 만들어낸 현수의 괴로움이, 과거 자신을 괴롭힌 아버지가 만들어 낸 그 괴로움과 닮아있었다는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재호는 처음 현수를 봤을 때부터, 자신의 삶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어두컴컴한 세상에 굳게 잠근 문고리를 그가 열어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자신의 구원자가 되어주길 바랬던 현수에게 결국 그는 빛 속에서 천천히 숨을 거두며, 자신을 가두었던 삶으로부터 해방되며 변화가 아닌 맺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그것이 그가 느끼던 죄책감에 대한 해방이며, 동시에 죄책감이 죽음의 과정으로 이르는 순간 동안의 고통으로 산화되는 것이 나름의 속죄의 모습이었다.


  



  영화는 결국 우리에게 '신뢰'라는 것에 질문을 던진 채 끝난다. 사람을 순수하게 믿었던 현수를 살렸고, 그에게 흔적을 남겼던 모든 사람들을 제거했다. '권선징악'이란 보편적인 교훈을 영화 속에 억지로라도 대입시키자면 대입시킬 수 있겠지만, 과연 남겨진 현수의 인생이 온전한 모습인가 생각해본다면 그가 텅 빈 구멍을 갖고 살아갈 세상은 항상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 제목의 '불한당'은 단순히 조폭 조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현수의 것을 모조리 앗아간 경찰과 세상살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영화의 마지막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현수의 표정이 앞으로의 살아갈 삶의 무게를 보여주는 듯했다.


  시선을 돌려 우리들을 살펴보자. 세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고, 우리는 무언가를 상실한 채 살아가곤 한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현실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많은 변수와 위험부담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하여 영화 속 현수와 같이 구멍을 안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나 중요한 점은 현수가 보여준 믿음에 죄는 없었다는 것이다. 떼를 지어 우리의 것을 빼앗는 불한당의 모습은 결국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 불한당에게서 살아남은 현수와 같이, 온전한 신뢰가 상처를 입힐 지라도 그 후유증으로 남은 구멍을 안고 현실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한 삶이 현수가 그리고 우리가 맞이하는 아침의 무게였고, 텅 빈 표정 속 담고 있는 상실 또한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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