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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un 23. 2017

'박열' 그 계란의 외침

영화 '박열'을 보고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아나키스트는 매력적이다.


  그들이 말하는 '폭력'과 '차별'로 대표되는 '권력'이란 것이 낳은 자유를 억압하는 사슬을 몰아내자는 그 사상은 무척이나 올곧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아나키스트들의 눈빛은 반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대한 체계에 대한 개인의 도전이 엿보이는 정신이 아나키스트에게 담겨있다. 그렇기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혹자들은 말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 뿐이라고.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병든 세계에 대한 항생제로 자신만은 저항한다고 속이며 스스로를 중독시키는 것이라. 그렇게 말한다.


  앞으로 이야기를 꾸며나갈 '박열' 또한 그러했다. '아나키스트'로서 그리고 평생을 자신의 마음에 울리는 그 소리에 여과 없이 반응하며 살았던 그의 삶이 그러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억압과 폭력의 세대를 살아가면서, 그는 하나의 목소리로서 그리고 하나의 상징으로서 살아갔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삶에 대한 한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이준익' 감독의 '박열'이 그것이다. 그 어떤 허울조차 거치지 않은 그의 삶은 하나의 시로 시작된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그의 시. 적나라하다면 적나라한, 숨겼다면 모든 것을 숨긴 그의 시가 영화의 시작이었다. '개새끼'로 비유된 자신의 처지를 단순한 욕지거리가 아닌 비난을 안고도 그들에게 '뜨거운 줄기'를 내뿜는 풍운아로 그려낸 것이 그였다. 그의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는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을 향한 것이었다. 그 시대의 색은 무척이나 탁했다. 꿈을 꾸어도 '일본' 그들을 위한 것이었고, 현실을 살아도 텁텁한 것이 목 아래 계속해서 걸리는 그런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서 '이상'이라는 것을 꿈꿀 수 있을까.


  하지만 박열(이제훈 분)은 그것을 했다. 자신을 옭아맨 사슬 하나하나를 저주하며 벗어날 그날을 꿈꾸었다. 때문에 그는 그렇게 자신을 '개새끼'로 비유하면서까지 자신의 가랑이에서 나온 더러운 것들을 일본에게 내뱉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박열의 삶이었다. 혹자들은 그가 단순히 '이상주의자'라며 비난했다. 바위에 힘없이 깨지는 '계란'일 뿐이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단단한 체계라는 벽에 부딪힌 '박열'이라는 개인은 결코 힘없이 부서진 '하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일본은 그를 경계했다. 그가 보인 확고한 방향성을 가진 눈빛은,  일본의 손아귀에서 삐져나온 눈엣가시일 뿐이었다. 일본 자신이 이용하기 위해 잡아넣은 박열은 몹시도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 쥐고 있다가는 데어버리는 그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요구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박열 그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박열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상을 꿈꾸었고, 끊임없이 숨을 쉬었다. 덕분에 달구어진 숨소리가 그토록 뜨거웠고 함부로 쥘 수 없는 그런 온도가 되었나 보다. 하지만 그가 내쉬었던 숨소리는 단지 그의 입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었다.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 그녀가 그의 숨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그녀는 아나키스트이기 이전에 철저한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버림받은 모든 것들이 그녀와 같았다. 자신의 소속감을 상실한 채,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 그 방향성 자체를 상실한 그녀가 바로 '무적자(無籍者)'였다. 인간이라면 존재해야 할 온갖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박탈이 그녀에게는 당연시되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그녀를 아나키스트의 길로 이끌었다.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가 안식처로 여기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안정성을 보장받는 '스펙'이라는 것이 전부이다. 모든 사람들이 방향성을 상실하고, '진정한 자신'보다는 '세상이 원하는 자신'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곧 목표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기본적인 틀을 이루고 있는 '세상'이라는 체계에 대한 반항을 하지도 못한 채 모두가 자신의 한걸음을 무겁게 하며, 옳다고 믿는 그것에 발을 내딛는 것이 전부인 세상이다. 결국 뒤돌아 봤을 때, 자신이 만들어낸 길 보단 남들이 맞다고 여긴 길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개새끼'로 스스로를 여긴 박열에게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이 바로 '가네후미코'였다.


  자신의 사형 판결에 '만세'를 외치던 그녀의 삶에 대해서 적응과 협조라는 편한 길을 내버려두고, 억지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힘겹게 숨을 내쉬던 그녀의 삶이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삶이 벗어난 길은 마냥 도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현실의 것보단 보이지 않는 그것들을 향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 현대의 바쁘게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며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것'의 영역을 넓혀가는 그들에게 '헛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단지 단단한 바위에 부딪혀 깨지기만 하는 힘없는 계란으로만 본 것이었다. 그들 속 숨 쉬는 그 '혼(魂)'을 보지 못한 그들이 내뱉은 미래 없는 단어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박열'과 '후미코'는 더욱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 서린 강한 생명력과 희망에 대한 올곧은 눈은 결코 꺾이지 않을 그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까지도 일본의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사형이라는 그들의 '끝'이라 생각된 그것을 감히 실행시키지 못한 것은 바로 박열의 말에 담겨 있었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그들은 분명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로 그들의 '혼(魂)',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바위에 부딪힌 계란은 단순한 소멸이 아닌, 그 투명한 흰자와 노른자로 이루지 못한 '생(生)'에 대한 열망을 남길 것이다. 바위라는 거대한 체계가 갖고 있는 단단한 벽은, 분명 계란의 얇은 껍질을 버텨낼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른 계란들의 시선을, 그리고 그 계란들이 낳을 또 다른 ''에 대한 연장을. 그렇기에 그들에게서 새어 나올 정신이라는, '무형'이기에 거침없던 그 깊은 숨결을  막아섰던 것이다.


  때문에 박열과 후미코가 맞이한 생명이라는, 인간이라면 갖고 있는 '생존'이란 본능의 연장을 온 마음을 다해 거부했던 것이다. 자신들을 막아서는 '육체'라는 그릇을 뚫고 온 세상 널리 자신들의 뜻을 전하길 원한 것이었다. 때문에 '살아라'라는 삶에 대한 당연한 부탁이, 그토록 안타깝고도 간절했던 이유였던 듯 싶었다. 그들에게 '삶'은 그러했다. 그들의 막지 못하던 '혼'이 나아갈 발판 그뿐이었다.



 

  그들의 사진을 보자. 옥중의 삶에도 그들은 이렇게 온갖 비뚤어진 몸의 각도와 주구 난방으로 튀어나가는 장난기 어린 행동들이 있었다.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눈빛은 올곧았는지도 모른다. '저항'이라는 그 거대한 세계로 부터의 작은 존재의 몸부림이, 그토록 크게 느껴진 것은 그들이 느낀 삶에 대한 박탈감이 우리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온전히 살고 있는 현실이 '본연의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들을 비웃던 현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최소한의 발걸음 길이만큼만 발을 내딛던 많은 사람들의 것과 다르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할 수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들이 내비치던 삶은 시대의 문제아를 넘어, 분명히 꺾이지 않은 혼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삭막한 삶이 배경이 되는 우리들의 삶 속, 잃어버린 그 '정신'인 듯싶기도 하다. 세상이 말하는 것들을 한 번쯤 고개를 저어보자. 그것이 우리들이 내딛는 다음 발걸음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소멸되는 어느 하나의 객기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보여준 '계란의 외침'은 물리적 제약을 벗어나 누군가의 지침이 되어 길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분명 그들의 외침을 본 사람들의 다음날 아침은 더욱 밝은 빛으로, 찬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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