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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Aug 20. 2017

마음은 지나가고 테이블은 남았다

영화 '더 테이블'을 보고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담겨있습니다.


그곳은 '카페'였다.


 누구나 올 수 있는 공적인 공간에서 수많은 사적인 대화들이 오간다. 뜨거운 커피를 식히는 동안 상대방에게 커피보다 더 뜨거운 사랑고백을 할 수 있으면서도, 반대로 시원한 음료수를 시킨다면 단숨에 들이켜곤 시린 속을 내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손 뻗으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테이블이란 것으로 두 명의 공간이 분리된다. 그 사이 영양가 없는 한없이 가벼운 대화가 나올지라도, 밋밋함을 채워주는 커피 향과 아득한 조명 아래의 둘 사이 설핏설핏 보이는 미소가 그 시간을 추억거리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어쩌면 무거운 단어들을 내뱉기 위해 무심코 들이켠 뜨거운 커피에 데어버린 마음만이 남은 채 돌아서기도 한다.


 '테이블'이란 공간은 결코 평면이 아니다. 그 위 갖가지 표정, 서로 다른 억양의 목소리, 무심코 건넨 선물, 혹은 다급하게 뻗은 손. 이렇게 테이블은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때문에 그 한정된 공간은 각자의 기억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이별의 잔향이 씁쓸한 실망감으로, 반대로 실망감이 새로운 설렘으로, 서로의 거짓을 탄탄히 하면서도 그 사이 새어 나오는 진심과, 그 진심들을 거부하기 위해 혀끝에서 힘겹게 밀어 올린 단호한 대답들.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 테이블'에는 그날의 시선이 담겨있었다. 꽃이 놓인 작은 테이블 하나와 손님들. 그들의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갖고 있었다.

 


 이별의 그리움은 쌓이고 쌓이더라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대신 그리움은 기억들을 서로 묶어 더욱 견고하게 하여, 추억으로 남아 마음 한구석에 단단하게 자리한다. 때론 그 모양이 너무나도 뾰족하여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아프게 하거나, 혹은 그것이 두꺼워져서는 마음의 문을 틀어막아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움은 그렇게 다양한 모양으로 끊어내지 못한 마음을 길게 꼬리처럼 늘어놓고는, 어쩌다 무심코 밟는다면 울음으로 모진 말로 또는 미소로 나타나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곤 한다. 꼬리를 매듭짓고 더 나아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자리에 나선다.


 그들도 그렇게 나섰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서 다시 만난 옛 연인은 머릿속의 추억과 겹치면서 익숙함에 미소 짓고 어색함에 또 한 번 미소 짓는다. 그렇게 서로에게 묻은 잔상을 털어내곤 후련하게 돌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를 하나의 '전리품'처럼 생각했다. 이별로 끝난 사랑은 누군가의 전리품이 될 수 없다. 전리품이란 승자의 것이다. 하지만 이별 앞에선 승자는 없다. 최악의 사람이라고 여겨지더라도 서로 나누었던 애정이 담긴 말들은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기에,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기엔 그토록 그 모습이 아름다웠기에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쉽다' 이 한마디가 그 길고도 길었던 잔향의 마지막 마침표가 되었다. 누군가는 마저 마시지 못한 김 빠진 맥주가 아쉽고, 누군가는 달콤한 추억이란 커피에 마지막으로 추가한 비루한 실망감이 아쉬웠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쉬워서 자꾸만 돌아볼 테지만, 누군가는 그 아쉬움에 잔상을 가득 담아 털어내 버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남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아갈 것이다. 이별 후의 만남은 그런 것이다.


 


 

 아쉬움만 가득 남은 그 테이블에 다른 두 명이 들어온다. 그들 또한 서로 '아쉬운 사이'였다. 그들의 역사는 3번의 만남과 아주 긴 공백으로 이루어졌고, 때문에 그 빈 곳은 설렘과 아쉬움이 공존하며 어쩌면 실망과 상처도 있을 것이었다. 이제 와서 채우기엔 너무나 긴 공백이었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답은 있었다. 바로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무게를 갖고 있다. 때문에 상대방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행동이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섣불리 안겨주었다간 그 무게를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고, 잘못된 손 모양으로 사랑을 건네주었다간 어느 한쪽이 놓쳐버려 깨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랑은 모습을 감추곤 한다.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숨겨놓았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빛이 나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미소에서 손짓 하나에서 그리고 눈빛에서도 빛이 난다.


 그렇기에 그녀의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서도 빛을 보았던 것이다. 몇 번이고 돌아서려 했지만, 그 눈부심을 몇 번이고 느꼈기에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그의 사랑은 그렇게 무게를 전달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간다. 하나 중요한 건 상대방 또한 그 빛을 내뿜어 자신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의 무게가 균형을 이룰 때 서로에게 보내는 사랑 고백이 온전히 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다. 사랑의 무게에 허덕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받아들여 깨지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의 아쉬움은 설렘이 되고, 사랑을 향해간다.



 설렘으로 떠나간 그 자리에 두 사람이 앉았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들은 거짓을 꾸미고 있었다. '가짜 모녀'가 그들의 관계였다. 악행이라면 악행이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악행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그녀는 너무나도 여렸다. 선의의 거짓말. 글쎄 이 단어도 적절한지 모르겠다. '선(善)'이란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애초에 다른 것을 고민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아 그래, 그들은 과연 거짓인가.


 오래전부터 수많은 영화가 진실의 힘을 노래해왔다. 거짓은 언제나 타파되어야 하는 그릇된 가치로 여겨졌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스크린 밖에선 거짓이란 것은 세상을 멸망시키지도 순수 악으로 타락시키지도 않는다. 때문에 작은 거짓말이 도처에 놓여있고, 그것은 '악'이란 이름 보단 '요령'정도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앞선 그들의 대화가 거짓을 꾸몄음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겹겹이 쌓고 있는 그 거짓 가운데에 하나 빛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진심'이었다.


 간절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침착하더라도 진심이 새어 나왔을 것이다. 선과 악을 나누기 전에 인간이란 존재가 자신의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뿜었던 그 염원(念願)이 아무리 거짓된 모습이라도 자꾸만 동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서로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모습에 다른 누군가를 겹쳐서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깊이 울려 퍼졌다. 단순히 정보를 알려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서로의 결여가 엿보였다. 그리고 서로가 그것들을 채워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일이 끝나도 그 카페 그리고 그 테이블에 다시 앉아 얘기를 나눌 것만 같았다. 그때는 딱딱한 거짓이 아닌 부드러운 거품 가득한 달콤한 커피가 그들의 대화를 꾸며줄 것이었다.


  

 마지막 손님이 찾아왔다. 저녁 무리가 되면서 비가 왔다. 빗소리에 묻힌 그들의 테이블은 더욱 고요했다. 어쩌면 뜯어진 꽃잎이 생명력을 잃었듯이, 그들의 대화도 서로에게 닿지 못해 테이블 위로 떨어져 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말했다. '어차피 죽은 꽃이야'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린 끝난 관계이고'


 사랑에 있어서 진정한 끝은 결코 이별의 순간이 아니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뒤로 돌아서서는 그 마지막 모습에 '혹시'라는 것으로 그 끝을 이어간다. 그리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혹시'에 매달았던 희망적인 상상은 한 방울씩 떨어져 나가 '역시'라는 웅덩이만이 남게 된다. 고여있는 기억이기에 너무도 지독하여 눈물을 흘려보내 씻어버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더욱 긴 시간이 지난다면 그 자리는 그대로 스며들어 얼룩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였던 것이다. 그렇게 '역시'로 새겨진 얼룩을 품고 '다시'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만나게 된 것은.


 늦어버렸다. 뒤늦게 그때의 감정들을 긁어모아보지만, 이미 그것들은 껍데기를 벗고 바닥에 쏟아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답은 정해져 있다. 그것을 알기에 두렵지 않았다. 그 대사들은 아직 얼룩으로 남지 않았을 때 나왔어야 했을 문장들이었다. 속에서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었을 문장이었지만 여전히 후회와 슬픔이 돋쳐 입 밖으로 꺼내면서 너무나도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싫어'라는 그 단어와 걸맞은 딱딱한 표정만이 그곳에 있었다. 창밖에 흐르는 빗방울이 눈물을 대신해줄 뿐이었다.


 분명 그들의 마음은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서로를 등진 채 각자의 길을 걸어나갔다. 사랑의 진정한 끝은 그런 모습이었다. 격정적이지도, 슬프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내리던 비가 그치듯이 젖은 땅바닥과 뜯어진 이미 죽은 꽃잎과 테이블의 빈자리만이 남을 뿐이었다.




 마음은 지나가고 테이블은 남았다. 내일이면 또다시 그곳에 수많은 대화와 마음과 표정을 담아낼 것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대화일 수도 있다. 어쩌면 대화 없이 서로를 지그시 바라만 보다 갈 수도 있다. 그리고 테이블은 그 자리에 또다시 남을 것이다. '더 테이블'은 그런 영화였다. 테이블 위 대화들이 담아낸 여린 향기를 보여주고, 빈 곳을 우리들의 표정과 감정으로 채우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스토리를 채워 넣었다고 생각하고 뒤로 돌아보면, 어째서인지 그들의 대사들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빈 테이블을 찾아 대화를 나누고 싶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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