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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Sep 09. 2017

사랑을 묻고, 사랑을 답하다

영화 '시인의 사랑'을 보고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는 사랑을 닮았다.


 사랑은 함축한다. 타인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은 손짓 하나로 건넨 말 한마디에서 어쩌면 무심코 바라본 눈빛에서 마음껏 뿜어져 나온다. 또한 착해서 좋다는 이유로 시작한 사랑이 착해서 싫어졌다는 수미상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좋아하는 마음을 대신하여 괜히 괴롭히는 서툴기만 한 반어법이, 그 마음이 부끄러워 뒤섞은 단어에 은유적으로 숨길 수도 있다. 


 '사랑'이란 단어는 이처럼 더욱 많은 표정과 감정과 마음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그 누구도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하며, 각자의 단어들로 사랑이란 단어를 채워 넣어가며 때론 하늘 위 구름에 걸린 황홀감에 때론 밑바닥에 들러붙은 찌꺼기보다 더한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다. 위험하다. 사랑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껏 세상은 논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사랑'을 붙여서 로맨틱하게 바꿔냈다. 그 '사랑'에 관한 마음은 또한 불가항력적으로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기 멋대로 날뛰기도 한다. 그 앞에서 인간은 그 누구보다 강해지기도, 또는 한없이 무력해지기도 한다. 


 여기 '시인'이 한 명 있다. 사랑에 도취되어버려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슬픔을 양식으로 단어들을 써 내려가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전부인 바로 그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를 필요로 하는 한 여인이 있고, 시인에게서 자신의 시린 곳을 어루만져주는 손길을 느끼는 소년이 있다. 김양희 감독의 '시인의 사랑'에는 '사랑'이 갖고 있는 낭만이란 미소와 위험이 만연한 이빨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시인(양익준 분)이 있다. 흔히 다른 작품에서 그려지는 매력적인 예술가와는 사뭇 다른, 꾀죄죄한 모습에 툭 튀어나온 배와 더불어 어쩐지 그를 둘러싼 어두운 기운까지 한데 어우러져 그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예술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삶의 '미(美)'를 추구하는 그 순수한 마음에 있었다. 


 아름다움을 쫓는 일은 매우 값진 일이다. 우리 세상은 색을 잃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숨쉬는 것조차 아까워 한번에 몰아쉬다 보니 한숨뿐이 된 이 세상에서, 지갑의 남은 지폐 수정도만이 유일하게 색 바랜 의미를 갖는다.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다. 무색의 세상이 조금 더 '효율적이다'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불우한 톱니바퀴들로 가득차버린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단지 흘러가기만 하면 된다. 인간이 갖고 있는 생존의 의미는 불을 막 발견하던 당시의 것으로 퇴화해버리곤, 단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불행히도 이것이 삶의 민낯이다. 아름다움만을 추구할 수 없는, 삶에 존재하는 비애를 끝끝내 외면하다가도 두려운 마음에 돌아서면 기여코 가슴 한쪽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서는 재촉되는 발재간에 휘말려 자신의 걸음걸이를 잃어버리는 그런 모습이다. 


 시인도 그러했다. 그에게는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속성에 포함되는 경제력도 정자도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현실적인 조건들에 등을 떠밀렸다. 그는 시인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눈물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름다움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함부로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불현듯 찾아온다. 그것은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없는 사랑을 억지로 만들 수도 없다. 시인의 아내(전혜진 분)는 사랑을 갈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인의 아이를 원했다. 그것은 욕심 아닌 욕심이었다. 남들처럼 살길 원했기에 가진 하나의 소원이다. 어째서인지 그 '평범한 삶'은 계속 멀어지는 것만 같은 모양새다. 시인의 아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짙푸른 색이었다. 우울하면서도 가벼웠다. 그가 휙 하고 떠나버린다고 해도 그는 시인이기 때문에 용서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에게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더더욱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은 분명 상대방과의 사이에서 경계를 갖기 마련이다. 건강한 사랑은 그 경계를 자신으로부터 멀리 두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마음의 무게를 버텨낸다. 하지만 이기적인 사랑은 경계를 자신 가까이에만 두어 자신의 감정을 버텨내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그 무게를 더해준다. 결국 누군가는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지쳐버릴 것이다. 시인은 아내의 사랑이 버거웠다. 아내가 은연중에 내비치는 책임감의 무게는 그를 더욱 압박했다. 그래서 시인은 헤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되었다.


 하지만 시인의 사랑도 그러했다. 그는 한 소년(정가람 분)을 만났다. 그 소년은 '함부로 아름다운' 수식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소년이 뱉은 한마디에 담겨있던 잔잔한 한탄은 그의 시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를 소재로 삼은 시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어떤 이는 그가 드디어 삶의 이면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어째서인지 시인은 그것이 달갑지만은 않다. 아내는 시인에게 말했다. '넌 비극이 필요한 거야.' 시인은 알고 있었다. 비극으로 가득 찬 인생의 쓴맛이 어떤지.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타인의 눈을 무시하고 자신의 눈에 소년을 가득 담았다. 그것은 매듭짓기엔 너무 큰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소년의 마음을 넓혀갔다. 그렇게 그 또한 이기적인 사랑이 되었다.


 


 소년은 공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의 빈 곳은 가족의 부재가 만든 것이었다. 누군가의 늘어진 그림자에 올라탄다는 것은 그만큼 빛을 갈망하게 만든다. 그는 아버지의 병마와 어머니의 지독하게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던 모습 뒤에서, 자신의 꿈이란 오색 투명한 부드러운 것들을 품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시인이 보내는 애정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가 보고 배운 것은 처절하게 사는 법뿐이었다. 그는 한 번 시인의 애정에 실망했다.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시인의 사랑에게 가장 현실적인 도구인 돈을 요구한다. 동시에 그것은 사랑을 도구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시인은 돈을 준다. 자신의 비극을 위해서. 사랑은 그 자체로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 품을 수 있으면서도, 돈과 같은 현실적인 조건을 더한다면 한없이 추악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소년 또한 이기적인 사랑을 택한 것이다.


 결국 사랑은 흑백 세상에 색을 더하지 못하고, 서서히 탈색되어 갔다. 각자의 사랑은 모두 이기적일 뿐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집으로 누군가는 갈망으로, 또한 누군가는 실망으로 남아서는 각자의 사랑에 필사적으로 충실하게 반응하였다. 그렇게 이기적인 사랑이었어도 그 누구의 사랑도 비난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릇된 인간성에서 나온 악한 마음이 아닌, 너무나도 순수한 진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각자는 사랑에 취했고, 각자의 숙취를 겪었다.




 영화의 제목은 '시인의 사랑'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이 정녕 사랑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되묻게 만든다. 줄곧 사랑에 대해서 노래해왔던 다른 영화에서 보여주던 꽃밭을 노니는 낭만적인 장면이나 사랑의 초월적인 힘이 발휘되는 장면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랑이 갖고 있는 그 의미에 대해서 충실하게 보여준 듯싶었다. 그렇게 사랑은 그들의 삶에서 답이 되었다. 그 모양이 영화 내내 망가지고 찌그러지고 부서졌더라도, 한 명은 새로운 발걸음으로 어떤 이는 아기의 미소로 누군가는 대신 울어주지 못한 마지막 시행으로 남았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영화는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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