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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Sep 15. 2017

참으로 영악한 영화, '어 퍼펙트 데이'

영화 '어 퍼펙트 데이'를 보고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극(悲劇)은 슬픈가?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면, 고민을 하는가 싶다가 단어의 뜻을 그대로 이어서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곤 다시 묻는다.

 

'비극은 슬퍼야만 하는가?'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고는 실눈을 뜨고 찬찬히 문장을 살펴본다. 단어에 의무와 책임을 물어보려 하지만, 그것의 주체성에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대답을 망설인다. 현실에 존재하는 비극은 누군가의 의도였다면 그것은 악행이며, 어떤 참극의 뒷이야기라면 그것은 가벼워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모습으로 남는다. 때문에 앞선 질문에 쉽게 하는 대답은 누군가의 저민 가슴을 다시금 두드리거나, 아픈 피를 다시금 확인하는 실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한 영화가 하나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감독의 '어 퍼펙트 데이'에서는 '전쟁'의 끄트머리에 남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속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는 이들을 통해 '비극'을 자신만의 색으로 그려냈다.



 영화는 건조하다. 그리고 유쾌하다. 그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이 적절하게 잘 배치되어 있다. '우물에 빠진 뚱보 시체'로 전후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농담이 필수인 동네 사람들이 영화의 배경이 되어준다. 이어서 자동차와 신나는 음악으로 모험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내다가 이어서 '소 시체 트랩'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마저도 웃음 지으며 뛰어넘었더니만 또다시 시체를 보고 헛구역질을 하게 만든다. 영화는 계속해서 분위기의 커다란 증감 없이 이 흐름을 유지한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일반적인 '영화'라는 포맷을 대입시킨다면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의 메마른 현상에 대한 시각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꾸준히 시각이 차단되고 자신의 앞길로만 온 신경을 모으게 된다. 그렇게 해야만 이 잿빛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기에 현대인은 과거 이웃들과도 쉽게 맺었던 친목이란 사회성의 기초가 되는 속성을 잃고,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타인에게 동조하고 동조를 구하는 것으로 잃어버린 사회적 동물에 대한 본능을 만족시키려고만 하는지도 모른다. 더욱 쉽게 많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되면서, 편 가르기와 집단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실상이다.


 동시에 사람들은 꾸준히 유머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세상에 대한 시선이 냉소적인 것과 비례해서, 찰나의 웃음이 더욱 값지게 된다. 마치 흩날린 총탄 위에서 가벼운 농담을 하는 마을 사람들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표정의 도화선에 열심히 불을 지피듯 유머러스한 콘텐츠는 온갖 진지한 소식들 사이사이를 채워 넣어준다. 때문에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면 정말 비인간적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어서 등장하는 각종 유머가 빈 곳들을 꾸며준다. 그리고 억양이 다른 두 가지의 장단을 유연하게 맞춰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진행은 익숙한듯하면서도,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라서 낯선 모습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비극을 표현하기에 효과적인 전개 방법이라는 것이다.



 전후라는 비극적인 설정은 정말이지 애매하다.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전투 중 빛나는 인간의 강한 정신력 따위나, 숨 가쁘게 휘날리는 총탄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극적인 장면 또한 없다. 영화는 그것들을 과감히 포기한다. 하지만 때론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빈자리의 고요함이, 남은 자들의 울음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들려줄 수 있는 법이다. 영화는 뜨거운 맛이나 매운맛보다도, 혀끝에 남은 쌉싸름함을 계속해서 우려내는 것으로 전쟁 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꼬마 아이 '니콜라(엘다 레지도 빅 분)'의 것으로 드러난다.


 보통의 전쟁영화에서 소년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처참한 현실 앞에서 무너져버린 소년의 꿈을 보여주며 참혹함을 보여주는 소모적인 캐릭터이거나, 만약 주인공이라면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하여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영웅적인 스토리가 소년의 것이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그 어떠한 역할도 짐도 지니지 않았다. 분명한 희생자의 역할이지만 진실로부터 격리되었다. 또한, 희망 가득 찬 앞날을 그려냈다기에도 단지 '전후 상황'이라는 것에서 파생된 '평화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분위기에 편승한 느낌일 뿐이다. 그것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이어간다.


 그렇기에 강요는 없다. 영화 내내 흘러가는 미묘한 긴장감은 중간중간 서려있는 가벼운 농담으로 풀어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 '밧줄개그'를 하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분위기를 만들고, 더 나아가 사랑싸움을 넣어 분위기를 더욱 가볍게 만든다. 때문에 장면을 뚝뚝 떨어뜨려 놓고 본다면, 신나는 노래와 덜컹이는 차를 타고 황무지를 누비는 농담 섞인 모험길은 코미디의 것이고 달빛 아래 사랑과 원망이 적절히 섞인 신경전은 로맨스의 그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미약한 긴장감을 갖도록 잘 짜여있다. 그것이 '기승전결'이라는 익숙한 스토리 라인에 의해서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전쟁'이란 배경속에서 잔류한 메마른 현실들이 드러나기에 그런 것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이미 전쟁 가운데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소피(멜라니 티에리 분)'는 처음 시체를 보고는 질색팔색 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다시 뚱보 시체와 만났을 때에는 가벼운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이 영화는 그렇다. 가벼운 듯이 포장해서는 온갖 전쟁의 참혹함을 무방비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무겁게 그려낼 수 있는 소재는 영화 속에서 얼마든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희생당하는 선량한 시민들이나, 차마 말해줄 수 없던 끔찍한 진실이나 구호활동과 부딪히는 UN군의 행보까지 수많은 장치들이 있었고, 주인공 일행은 그것들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고 영화는 말해준다. 영화 내내 이어온 가벼운 전개가 분명히 희망이 올것이라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영화의 엔딩 장면에선 보란 듯이 그것들을 주인공 일행의 손 밖에서 매듭짓는다.




 유명한 말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영화는 내내 이 문장 하나를 표방하는 것만 같았다. 영화의 제목인 '완벽한 날'은 소피의 입에서 나오면서는 철저히 반어법의 형태였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영화가 얼마나 제목에 충실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흔히 보았던 전쟁 영화에서 느끼던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해줌과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에 곁든 유머로부터 나온 웃음에서 묘한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처음 든 생각은 '참으로 영악한 영화네'였다. 전쟁을 소재로 만든 영화는 가벼워서는 안된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뒤에 이렇듯 가볍게 풀어낸 비극 또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영화 내내 가볍게 미소지었지만 무엇보다 무거운 전쟁이란 소재를 우리 가슴 한쪽에 한덩이씩 집어 넣은 뒤였다. 영화 내내 웃고 훈훈한 마음으로 마무리짓고도, 입가에 묻은 쓴내들을 털어내지 못하고 내용을 한번쯤 다시금 곱씹어보게 만드는 잔향이 깊게 남는 영화가 바로 '어 퍼펙트 데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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