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빛나는'을 보고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선 문장이 어느 종교의 첫째 날을 대표하는 문장이 된 것처럼, 우리 세계는 '빛'이란 무형의 존재를 시작과 긍정의 대상의 속성으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어쩌면 불행히도 '어둠'이란 것이 존재한다. 빛을 가지지 못한 그 모든 것들엔, 바로 이 어둠이 담겨있다. 사람은 이 두 가지 속성이 혼재된 세상 속에서, 거리를 재며 자신의 삶의 색을 정하게 된다. 그것은 괴롭거나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각각의 속성은 정반대에 놓여있고 인간은 주체성을 갖기 때문에 두렵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자비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깊숙이 눌러버린 발자국이 자신의 삶의 꼬리표가 되어, 되돌아가거나 부정할 수 없는 자신만이 놓여있기 마련이다. 그곳에서 바라본 빛과 어둠의 희미해진 경계선은, 그렇다. 두려울 것이다.
여기 두 남녀가 있다. 맹인의 과정에 놓인 사진작가, 그리고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간 초보 작가. 서로에 대한 자각이 찌푸린 눈 커플 사이 빛 가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지만 그것마저 빛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그런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시작해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가와세 나오미'감독의 영화 '빛나는'에서는 두 남녀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얘기한다.
빛은 나아간다. 사방으로 그리고 그 닿을 수 있는 끝까지 자신의 손을 뻗친다. 때문에 여백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공간을 가득 채워냈다고 해도 무겁지 않다. 또한 그 색이 투명하여 거침없이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기에 여리다. 얇은 벽 앞에서 한없이 무너져, 짙은 어둠이 되어버리고 한다. 빛을 잃는다는 건 두려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남자는 빛의 끝머리를 부여잡고 애써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손에는 지팡이 대신 카메라가 있었다. 그런 그가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초보 작가이다. 보통 생각되는 작가와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맹인들의 눈이 되어 장면을 설명해주는 그런 작가이다. 때문에 그녀의 단어는 그들에게 세상을 열어주기도, 혹은 몇 개의 단어로 가둬버릴 수도 있다. 남자는 그녀의 형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의 단어들로 채워진 그들의 공간은 여백이 없었다. 그것은 남자의 보이지 않는 눈에 거슬렸고,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다. 그녀가 억지로 채워 넣으려 했던 '희망'은 그녀 또한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의 역설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엔 '아버지'라는 구멍이 있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공백은 어둡기만 하다. 하지만 그것이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는 무언가를 잃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싶더라도, 안타깝게도 거대한 세상에 비해 우리의 손은 소박하다. 손에 간신히 담을 수 있는 것들마저도 세게 쥐어버린다면 부서질지 모르는 여린 것들 투성이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놓치고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삶 곳곳에 놓여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들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상실이란 것은 그렇게 적응할 수 없는, 하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그와 그녀 모두 상실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승자 없는 싸움이었다.
그녀는 그를 우연히 보았다. 사라져 가는 시야 사이에서 찾은 실낱같은 빛줄기에 의지하여, 장면을 남기려고 하는 그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과 닮은 구석을 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일침을 가한 그의 뒷모습에는 그 또한 절박했음을 말해주었다. 바닥에 놓인 사람을 본다면, 아무리 밉더라도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에게 새어 나온 연민과 동정이, 어쩌면 자신이 필요로 했을 그 감정으로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게 했다.
이토록 동정과 연민은 무서운 감정이다. 상대의 어두운 부분에 의해 생겨난 감정이라 퇴보가 없다. 대신 손을 내밀다가도 그와의 온도차에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둘 뿐이다. 사실 그들은 꽤나 다른 온도를 갖고 있었다. 여자는 빛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때문에 영화를 서술해주며 그녀가 보인 감정은 한없이 밝기만 하다. 영화를 희망이라 생각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바람과 달리,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거짓된 희망을 바라보았고, 남자는 진실된 절망을 외면하고 있었다. 엇갈린 방향이 그 둘을 같은 선 위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다 그녀는 그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기억의 단편과 같은 모습의 그의 시선이 있었다. 둘은 마주 보고 있진 않았지만, 뒷걸음질 치며 서로에게 다가서서 가깝게 있었다. 결여에 의한 사랑.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에로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서로는 각자가 갖고 있는 구멍에 이끌려 서로를 원하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눈이 되어주었고, 남자는 여자 의가 받아들인 구멍을 메울 또 다른 사람이 되어주었다. 그 가운데 사랑이라는 단어가 놓여있었고, 빛나는 것이 그들 앞에 있었다.
영화는 빛으로 가득 차 투명하다. 억지로 감정이 차오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정적으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삶과 죽음은 영화에서 빛과 어둠으로 대변되고, 그 사이 사랑을 집어넣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스토리였겠지만, 영상과 분위기와 이야기의 흐름은 그것을 가슴 깊이 남도록 아름다웠다. 마지막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을 끝으로, 영화 '빛나는'은 그대로 투명하게 다가와 우리 몸을 따스히 해주고 또다시 나아갈 것만 같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