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족구왕>을 보고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G서포터즈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긴 시간이었다. 만섭(안재홍 분)은 허겁지겁 학교 족구장으로 달려갔지만, 마주한 것은 지나간 시간만큼 변해버린 장소였다. 추억을 다잡으려 다가섰지만 마주한 현실은 그렇게 만섭을 덮쳐왔다. 이제 갓 제대한 전역자의 패기를 부린 것인지, 아니면 아쉬움에 내뱉은 투정의 연장선인지 만섭은 족구장의 부활을 대학 총장에게 부탁한다. 모두의 비웃음을 사도 만섭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서있었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바람이 불어왔다. 새 학기의 봄 향기를 닮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다가온 안나(황승언 분)가 단단히 만섭의 가슴 한편에 각인되었다. 둘은 함께 영어 회화 수업의 조를 이루며 대화도 나누고 가까워질 터였지만, 둘 사이 관계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환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만섭은 그렇게 두 가지의 목표를 찾았다. 족구와 안나.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어찌 보면 멋대가리 없을 수 있는 꿈이었지만, 만섭에겐 그 어느 것보다도 커다란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섭은 멈추지 않았다. 족구장의 부활을 위해 서명을 모으고 또 안나에게 진심을 보이며 그녀의 마음을 잡으려 한다. 복학생이란 신분은 그렇게 묘사된다. 신입생의 풋내기 티를 벗고 사회인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 탑을 쌓아야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복학생의 냄새를 풀풀 풍기며 행동에서 묻어나는 오묘한 아집과 첫눈에 반한 사랑을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마냥 밉지만은 않다. 순수하면서도 우둔한 그의 모습이 흔히 말하는 '아재'에 다가서는 과정이므로
영화 <족구왕>은 영웅의 이야기를 따른다. 소위 '찐따'라 불리는 자들을 모아 성장하여 궁극의 목표를 이루고 '영웅'이 되기까지. 다만 그 목적이 세상을 구한다든지 절대악을 처단한다는 것이 아닌, 단순히 족구장의 부활과 사랑 정도의 소소하다면 소소한 목적일 뿐이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각자의 결함은 현실의 범주 안에서 그 누구든 갖고 있을 법한 것들이다. 꿈에 좌절하거나, 다이어트를 한다거나, 사랑에 실패한다거나 그리고 현실을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거나 하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매력을 뽐낸다. 덕분에 그들을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된다. 마치 우리 스스로를 다독이듯이 말이다.
현실에서의 영웅은 고작 그것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이루어나가는 모습으로,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감히 누군가 쉽게 그리하지 못한다. 혹자들이 말하는 배고프다, 굶어 죽는다 라는 소감으로 대변되는 직업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찬란히 빛날 수 있는지 영화는 족구를 통해 말해준다.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족구 앞에 붙이는 수식어들은 '그까짓'이나 '겨우'정도로 얕잡아보지만, 만섭은 자랑스럽게 족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체육대회의 주종목에까지 이르는 모습은 누군가의 꿈이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화는 영화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만섭은 안나에게 간지러 드는 고백을 하고, 족구대회에서 우승해서 라이벌도 제거한다. 우승을 알리는 휘슬소리와 함께 영웅과 히로인의 포옹과 뜨거운 키스를 배경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식의 마무리를 했어야 한다. 하지만 <족구왕>은 그러지 않았다. 참으로 현실적으로 일명 '호구 짓'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영화를 마무리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것이 현실의 한편으로 영화를 끌어온다. 무모했지만 분명 빛이 났던 만섭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후련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실패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것은 좌절과 절망이 아닌, 후련함과 뿌듯함이었다. 후회없는 표정으로 어디론가 떠나가는 만섭의 모습은 세련된 마지막 장면이었다. 만섭은 또 나아갈 것이도 어쩌면 또 실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빛났기에, 언제나 그 날개짓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세상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모습 그대로 우리를 다독인다. 현실 속에서 자신의 여린 꿈을 가슴속에 묻고만 사는 사람들에게 만섭은 이렇게 속삭인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같다고 생각해요.
라고 씨익 웃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