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념의 선택

그들이 역사 속에서 행한 선택들

by 나호정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문장은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 수많은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우리는 결혼이나 취업 등등 큰 선택은 물론 저녁을 무엇을 먹을지, 내일은 무슨 옷을 입고 갈지 하는 작은 선택들까지,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 앞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하게 한다. 현재 대학생인 우리들도 수많은 선택을 거쳐서 이 자리에 왔고,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지들이 인생에 놓여있다. 그 수많은 보기들 중에서 사람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 올바른 선택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행히도 과거 여러 사례들로부터 '경험'이라고 불리는 선택의 결과물들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들의 경험에서 이러한 고민들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모한다스 간디'는 인도인들의 독립, 그리고 그 이상의 인류의 해방을 위해 '무저항 비폭력'을 내세우며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러한 삶을 살아간 것은 아니다. 그의 자서전인 <간디 자서전>에는 그가 삶에서 이런 '선택'을 한 사건이 나와있다. 그는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몸소 느낀 뒤에 하나의 선택과 판단을 한다.


나는 나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이냐, 인도로 돌아갈 것이냐? (중략) 내가 당한 고통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라는, 깊은 병의 한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라도 그 병의 뿌리를 뽑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시련 | 『간디 자서전』(모한다스 간디, 함석헌 옮김) ⓒ한길사, 2009]


바로 이 부분이 간디가 한 '선택'을 보여준다. 그는 인도로 돌아가지도, 자신이 받은 모욕을 참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남아서 인종차별을 뿌리 뽑기 위해 싸우기로 결정한다. 여기서의 이 선택 하나로 그는 수많은 인도인들을 차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인도의 신으로까지 불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비폭력 정신'을 알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그의 이런 경험에서 평범한 변호사의 인생을 살 수도 있었던 간디는 열정적이고 강한 마음을 가진 투사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러한 유색인종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힘썼던 인물은 또 있었다. 바로 '넬슨 만델라'이다.



넬슨 만델라는 어렸을 때 자연을 벗 삼아 자라 왔다. 이것은 그의 감성적인 부분들을 성장시켰다. 넬슨 만델라는 드넓은 초원에서 자연이 지닌 단순하고 선명한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까지 말하며 자연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넬슨 만델라 또한 어렸을 때 순수한 마음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만델라 자서전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그것을 살펴볼 수 있다. 넬슨 만델라는 열여섯의 나이가 되었을 때, 성년의식인 할례를 치렀다. 그 의식을 통해 넬슨 만델라는 소년에서 벗어나 마침내 성인이 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의식이 끝나고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중, 의식의 마무리 단계인 추장의 연설은 그런 그의 마음에 훼방을 놓게 된다. 그것의 내용은 그들의 의식을 통해 이루어낸 남성의 약속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흑인들이 피정복자이기 때문이라는 다소 냉정한 단어들이었다. 이것은 넬슨 만델라를 포함해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것은 현실이었지만, 그들에게 백인들은 교육과 여러 혜택들을 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꽤 중요한 때에 놓여있었던 넬슨 만델라는 이 말을 무시하며 그냥 차별받는 흑인으로서의 삶을 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말이 곧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내게 씨앗을 뿌려놓았던 것이다. 비록 내가 오랫동안 그 씨앗을 방치해두기는 했지만. 그 씨앗은 결국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 『만델라 자서전-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넬슨 만델라, 김대중 옮김) ⓒ두레, 2006]

이 부분을 통해 그는 추장의 말을 노인의 잡설이 아닌 자신에게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에 투사의 길을 걸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투사들만이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이병주의 소설 <변명>에서도 선택과 판단의 순간들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의 마지막쯤에 그는 자료들을 태우던 중 ‘탁인수’라는 순국자의 문서를 보게 된다. 그는 일본의 군대에서 정보를 훔쳐 달아나 독립을 위해 상해에서 동포들을 포섭하던 중, ‘장병중’이라는 사람의 밀고로 결국 광복을 두 달 앞두고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은 그 후에 장병중이 자신의 과거 행동들을 숨긴 채 위선적인 애국자의 모습으로 여러 방면에서 이익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며, 주인공이 취해야 할 행동에서 많은 갈등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소설에 이런 장면을 넣으며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서둘지 마라. 자네는 아직 젊다. 자네는 역사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써라.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변명 | 『변명』(이병주, 김윤식˙김종회 엮음) ⓒ바이북스, 2010]


소설에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입을 빌려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은 곧 주인공이 한 선택을 나타내는 것이다. 주인공은 장병중과 같은 사람이 이미 사회 곳곳에 많이 있고, 장병중 한명만 보아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문학의 힘'을 믿기로 했다. 그는 '섭리'로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의 불합리성의 피조물인 장병중을 직접 처단하기보다 문학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알리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의 차이점은 본인의 마음가짐에 있다. 이는 다음 소개할 루쉰의 <후지노 선생>에도 등장한다.


루쉰는 어렸을 때 전통 중국 의학에 대한 맹신을 보여준 아버지의 허무한 죽음을 목격한 뒤로, 서구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돌아온 뒤에 수술용 칼이 아닌 펜을 잡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일본으로 간 첫 번째 선택 이후에, 다시 돌아오는 두 번째 선택을 하게 된다. 겉 이야기만 보게 되면 자칫 이것이 그가 의학도의 길을 '포기'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의 순간을 살펴본다면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루쉰의 <후지노 선생>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사람 한 명이 러시아의 정탐 노릇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는데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무리들도 모두 중국 사람들이었다. (중략) 그 후 중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나는 범인을 총살하는 것을 무심히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도 어떤 이유인지 술 취하지도 않고서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로구나! 하지만 그때 그곳에서 나의 생각은 변했다.

[후지노 선생 | 『아침 꽃 저녁에 줍다』(루쉰, 김하림 옮김) ⓒ그린비, 2011]


그는 일본을 포함한 타국에서 보이는 중국인들의 모습과, 실제로 중국에서도 그것과 다르지 않는다는 것들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걷는 길을 바꾸게 된다. 여기서 루쉰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앞서 설명한 소설의 주인공처럼 단순히 포기를 한 것으로 잘못 비쳐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행한 것은 포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중국으로 돌아온 후에 문예활동을 통해 많은 중국인들의 의식을 계몽시켰다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선택을 할 때 보인 의지의 모습이 그것이 포기인지 아니면 단지 다른 선택을 하는 것뿐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루쉰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며 의학도의 길에서 문예가의 길을 '선택'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지가 담긴 선택은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더 큰 의미를 보여준다.


사마천의 <보임안서>에서는 '죽음'앞에서 보여준 강한 의지가 담긴 선택을 찾아볼 수 있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한무제 때의 인물이다. 그는 적군에게 항복한 이릉이란 장군을 변호하다 한무제에게 미움을 사 궁형이라는 당대 최고로 치욕스러운 형벌을 당하게 된다. 그의 선택지에는 '죽음'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는 평생 치욕을 당하고 신체적으로도 하루에 내장이 아홉 번이나 뒤틀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살아남았다. 그가 이런 죽음이 아닌 험난한 인생이 뻔히 보이는 삶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쓴 <보임안서>의 한 부분에는 그것이 드러나있다.

치욕을 참고 구차히 살면서 더러운 삶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제 마음에 다 말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 한스럽고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 문장의 찬란함이 후세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입니다.

[보임안서(報任安書):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 『한서』「사마천전」(사마천, 전호근 옮김, 2012)]

즉, 그는 삶을 마감하기에는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하며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그 이후에 <사기>라는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서를 만들게 되고, 그는 동양에 최초로 역사라는 것을 정립한 선구자가 된다. 그의 강한 의지가 그를 죽음 앞에서 온갖 치욕을 받고도 살아남게 하였고, 결국 그것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많은 위인들이 선택과 판단을 하여 여러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앞서 설명한 두 명과 그 외의 세명의 선택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것의 차이는 바로 '선택의 방향성'에 있다고 본다. 간디와 넬슨 만델라는 유색인종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힘쓰면서 다른 사람들의 리더로서 선택의 결과가 바깥으로 작용해 많은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반면에 그 외의 세명은 선택의 결과가 자기 내면의 변화로 이어져 창작활동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게 되어 간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다. 하지만 이것이 '외향적인 선택'이 '내향적인 선택'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외향적인 선택이 더욱 넓은 범위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볼 수 는 있다. 하지만 그것의 깊이들을 따져본다면, 단순히 어느 한쪽이 더욱 깊다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위에서 보였던 선택이란 순간들을 살펴볼 때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그들의 선택에 공통적으로 작용되었던 것은 바로 '의지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들의 선택은 '포기'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아닌 하나의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과정으로써 작용될 수 었었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에 빠진다. 과연 그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갖게 해줄 '신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따라 답은 정해진다. 앞선 글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투사적인 삶이나 위대한 문학작품이 아니다. 그들은 선택이라는 것을 할 때의 자신의 '신념'과 그것에서 나온 '의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며 많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순간들 앞에서 올바른 신념에서 우러러나온 강한 의지를 지닌 채 선택을 한다면,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하나의 선택들이 경험으로 남아, 인생이란 여행을 더욱 멋지게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keyword
나호정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회사원 프로필
구독자 1,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