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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미 만년필 <올리카> 리뷰

소유물과 애정

by 나호정

바쁜 나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별생각 없이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에 문득 뉴스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모나미, 저렴한 만년필 <올리카(OLIKA)> 출시!'


만년필이란 것은 내 머릿속에서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고급스러운 고전적인 소품이었다. 오히려 그 때문이었는지 '저렴한 만년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가격은 말 그대로 매우 저렴했다. 3000원. 머릿속에 있던 꽤 비싼 모양으로 자리해있던 만년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였다. 나는 낯선 물건에 대한 호기심과 소비활동을 통한 기분전환이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구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10가지의 색깔 중에 가장 무난한 검은색 만년필 하나와 빨간색 만년필 하나 그리고 검은색 리필용 카트리지를 하나 샀다. 장바구니에 꽤 넣었음에도 가격이 5자리가 되지 않는 것이 꽤나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주문을 하고는 바쁜 일상 속에서 금세 주문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3일 뒤 택배가 배달됐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며칠 전 주문한 만년필임을 알았다. 인지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내 돈으로 샀지만 갑작스러운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덕분에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택배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택배 상자를 아무렇게나 뜯고는 바로 만년필과 마주했다.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만년필은 3000원이라는 가격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세련됐다. 처음으로 만져본 만년필의 느낌은 '묵직하다'였다. 여느 펜과는 다르게 손아귀를 가득 채운 만년필은 적잖은 무게감을 가졌고 그것이 펜에 힘을 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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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몇 번 종이 위에 펜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종이는 잉크가 묻지 않아 깨끗하였고, 만년필의 끝이 남긴 자국만이 있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됨을 깨닫고 인터넷을 켜고 검색을 시작하였다. 처음 마주하는 만년필이 주었던 무안함은 곧 나에게 흥미를 일으켰고, 나는 설명이 잘 돼있는 사이트 하나를 찾았다. 그곳엔 '올리카'뿐만이 아닌 다른 만년필에도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몇 가지의 정보가 적혀있었다. 그중에서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었다.


만년필의 닙(펜촉)은 쓰면 쓸수록 사용자의 필압과 습관에 의해 조금씩 닳면서 사용자에게 맞춰집니다. 때문에 만년필은 '인생의 동반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그 문장을 나는 두 번이나 더 읽어보았다. 만년필이 갖고 있는 이러한 설정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설정이 아닌 실제로도 그러한 역할을 했지만, 인생의 동반자라는 매력적인 별명을 나는 무심코 지나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물건에 애착을 잘 갖지 않는 편이다. 타인과의 관계 사이에서 주고받은 선물 몇몇 개를 빼고는 나의 물건들은 소모품의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에게 '옷'이란 것이 그러했다. 싼 가격으로 옷을 사고 조금 헤지거나 유행이 지나면 미련 없이 버리곤 한다. 일주일에 4번을 입을 정도로 즐겨 입던 옷도 하루아침에 버릴 정도였다. 이 정도로 물건에 애착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 이 만년필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제대로 만년필의 사용법을 익히고 종이 위에 시연을 해보았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어색한 모양으로 한 글자씩 이어나갔다. 종이를 갉아먹는 듯한 신경 쓰이는 소리도 그리고 어색하게 쥐어져 펜 위를 매끄럽게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도, 나를 위해 서로가 맞춰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그것들은 만년필만이 갖고있는 매력적인 색(色)이 되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단순히 시각적인 맛뿐이었던 글씨를 쓰는 일에, 내게 청각과 촉각을 돋우어 더욱 풍부한 감각들로 가득 '글쓰기'를 채워주고 있었다.


그 과정은 중독성이 있어서 나는 A4 한쪽을 빼곡히 다 채우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단돈 3000원 짜리의 소모품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 소유물에게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물건에 대한 애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나의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줄 만년필이 내게 설렘을 주고 있었다.


여느 리뷰와 같이 별점과 함께 끝을 맺고 싶었지만, 애정이 깃든 물건에 별점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것들이 담겨있어 함부로 그러지 못했다. 다만, 이 모나미 올리카 만년필을 살지 고민 중에 놓여있다면, 자신의 인생의 동반자를 맞이하는 이 과정들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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