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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un 22. 2016

당신의 인생은 무슨 색인가?

영화 <더 기버 : 기억전달자>에서 찾은 '잃어버린 감정'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 이규경, '용기'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사진이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규경 시인의 시 '용기'를 옮겨 적은 공책을 찍은 사진이었다. 어린아이의 글씨체는 시에 투명함을 담아 마음속 깊이 다가올 수 있게 만들었다. 시의 마지막 문구인 '나는 못해요.'는 매번 용기라는 단어의 정답처럼 여겨졌던 '할 수 있다.'라는 말과 정반대인 문장이지만, 이 시의 제목이 용기인 것과 비롯하여 시는 진정한 용기에 대해 깨달음을 준다.


한국의 교육 환경은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인 성격이 강하다. 교육의 목적이 배움에 있지 않고 단지 미래의 대입이나 취업에 놓여있으면서 곧이 곧대로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빠르고 올곧은 길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환경은 대한민국이 정답 사회가 되는 것을 부추기고, 결국 다른 답을 말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용기가 용인되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다. 좋은 대학이나 취업이 정답으로 알려진 세상에서, 용기를 갖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철없는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그 가운데 사랑, 행복, 즐거움 등의 여러 감정이 담긴 단어들을 현실이라는 이유 앞에 과감히 지워버리고, 더 나아가 연애, 결혼, 자기관리와 같은 것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마치 이러한 현시대를 극단적으로 반영한듯한 영화가 하나 개봉했다. '로이스 로우리'작가의 '기억전달자'를 원작으로 한 '필립 노이스'감독의 '더 기버 : 기억전달자'의 영화가 그것이다. 위에서 포기한 것들인 결혼, 자기관리 등을 포함한 직업까지 모두 나라를 통치하는 원로들이 정해주어, 세상에 마찰이나 혼란을 전무(全無)하게 만든 세상이 영화에서 존재한다. 그곳엔 고통이나 혼란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통제하여 이것이 완전한 평등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는 세상에서 딱 하나의 변칙적인 직업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기억전달자였다.


사과드립니다.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통제 수준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정해주는 커뮤니티라는 시스템으로 그로 인한 마찰을 없애버리고, 정확한 언어 사용이라는 규칙으로 '사과드립니다.'라는 말에 '사과를 받아들입니다.'라는 대답을 필수적으로 하게 만들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마저 제거해 버렸다. 영화의 첫 화면에서 알 수 있듯이 흑백의 화면이 통제의 극단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평등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평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평등은 결과적인 평등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공산주의(共産主義)사상과 다를 바 없다. 현실에서는 많은 부작용을 띄는 이러한 시스템이 영화에서 가능한 이유는 단지 감정을 결여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결여된 감정은 불만이나 만족을 판단할 근거를 없애버렸고, 이 시스템을 운영 가능케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적인 평등은 단지 생명을 출산시키기만 하는 출산모나 사람의 죽음을 죄의식이 결여된 임무 해제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등의 비인간적모습이 전제가 되어야 가능한 사상이다. 때문에 영화에서의 평등은 전혀 올바른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다만, 구속(拘束)이란 단어를 억지로 미화시켰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인공 '조나스(브렌튼 스웨이츠 분)'는 이 세계에서의 유일 직업인 '기억전달자'로 선정된다. 이런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유일한 인간다움이 허락되는 그의 직업은 비인간적이었던 그의 삶에 충격을 준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뿐이야.
내 안의 모든 기억을 네게 전달하는 것이지.


과거가 지워진 그들 세계에 유일하게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기억 전달자라고 불리는 말 그대로 기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그들의 역할은 지워진 과거에서의 경험으로 현재의 정답을 조언해주는 것뿐이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 또한 과거를 통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함의 목적으로 기억전달자를 만든 것이었다.


전의 기억전달자였던 '더 기버(제프 브리지스 분)'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형식적인 대화를 하지 않고, 영화의 세계관에서 금지된 거짓말이 가능하고 감정또한 갖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보통의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비인간적인 영화의 다른 인물들을 토대로 오히려 그가 영화 속 세상에서는 비인간적인 모습인 양 그려진다. 하지만 이는 능사 영화 속 일만은 아니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 또한 이러한 감정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현실의 조건들을 따지지 않은 채, 감정을 갖고 그리고 그 감정을 위해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틀린 길로 정해버리곤 한다. 때문에 '입시 - 대학 - 취업'의 단계를 온전히 거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나아가는 사람들을 '대단하다'라고는 생각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직접 하기는 꺼려한다. 이러한 현실은 자신의 감정을 희생이라는 단어로 억지로 꾸며내며, 애써 세상이 정해준 자신의 길이 정답으로 보이게 만든다. 감정은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뿐인 거처럼 여겨지기 마련이고, 우리는 감정을 자신의 삶에서 도려내며 해결하려 한다. 주인공 조나스 또한 이러한 감정이 그에게 혼란을 가져오게 만든다.


전 충분히 강하지 않아요.


더 기버는 그에게 처음에는 사랑, 예술, 행복과 같은 것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하며 긍정적인 감정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감정은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후에 본 죽음, 전쟁, 고통등의 모습들은 그에게 부정적인 감정들 또한 감정이란 울타리 안에 공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모두 가진 모습은 감정이란 것의 당연한 요소이지만, 백지상태였던 그의 세계에 밀려들어온 형형색색의 감정들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강인함을 부정하며, 그것들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또한 이런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감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행복하길 바라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현실의 가혹함 앞에 우리는 고통과 역경을 두려움이란 감정으로 맞이한다. 이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것으로 애써 부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고통을 치유해줄 여건을 제공해준다는 보장이 없고, 결국 그러한 불안감에 다른 긍정적인 감정들 조차 지워버리며 영화 속 사람들처럼 감정을 없애기를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곤 한다.


영화에서 그 또한 임무 해제를 하기를 원하면서 자신에게 생긴 감정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감정이 주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우려 했던 감정 덕분이었다.


사랑한다 조나스.
네겐 용기가 있으니 힘을 주겠다.


그는 혼란 속에서도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갖는 힘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피오나(오데야 러시 분)'를 생각하며 힘을 냈고, 그의 도주 중에는 친구인 '애셔(카메론 모나한 분)'의 우정에 의해 그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 이러한 그가 찾은 사랑, 우정과 같은 감정들은 서로를 신뢰라는 단단한 끈으로 묶어주고, 이는 곧 용기로 이어져 조나스가 도전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가 얻은 용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용기였다. 그가 이러한 감정들 사이에서 용기가 없었더라면, 다시 세상이 정해준 정답에 맞춰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감정들 사이에서 용기는 다른 감정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영화는 이 모든 갈등들의 해결의 열쇠로 용기를 택하면서 다른 감정들을 열수 있는 열쇠로 작용시켰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기억의 경계선에 다가갈 수 있게 되며, 모든 사람들이 감정을 갖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구한 또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갓난아기를 미래라고 칭하며, 감정이 없는 사회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영화 초반 기억에서 보았던 썰매와 집(home)이 실존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그것이 희망을 뜻하는 것이었고 마침내 현실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영화 속 세상은 마침내 색을 갖게 된다.


영화가 보여준 기억 전달자. 아니, 영화의 중반부에 더 기버가 칭한 감정 보유자는 어떤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될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이라는 것과 억지로 타협하며, 감정을 통제하고 세상에서 색을 지워버리곤 한다. 영화의 초반 색이 없는 세상에 미래는 없다. 단지 색이 없는 세상이 이어질 뿐이다. 영화는 이러한 색을 잃어버린 세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그리고 조나스의 용기어린 도전기를 통해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현실의 우리들은 그가 그토록 원한 색이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기억 전달자들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감정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이는 결코 대단한 일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이 정답이라고 외치는 사이, 그 정답을 부정할 수 있는 용기에 의해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영화밖으로 나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자.

당신의 인생은 무슨 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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