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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un 30. 2016

현실 속 '엘리시움'

영화 <엘리시움>에서 찾은 '이상향'에 대한 자세

대한민국이 '전기가스 민영화'로 인해 떠들썩하다.


민영화라는 말은 국가가 운영하던 분야를 특정한 민간에게 책임권을 주어 운영토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민간 즉, 기업에 넘어간다면 자연스럽게 이윤 창출이 목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좋은 기술력과 서비스로 더욱 편해진다는 기대를 할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흔히들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들의 가격 인상이 부담으로 다가올 걱정을 하고 있다. 전기, 가스, 의료 등등 대한민국 내에서는 많은 분야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그것의 장단점들이 논해지곤 한다. 


최악의 경우 그것은 조선시대에 사라진 계급 사회를 재구성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상위 1%만이 민영화의 결과로 이루어진 최신의 기술에 합당하는 비용을 지불할 능력을 갖추게 되고, 이것이 곧 계급처럼 여겨져 의료와 같은 필수적인 요소에서 단지 돈 때문에 차별을 받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 것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러한 돈이 계급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에 들어서 돈이란 것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것에 대한 사항은 사람들에게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연하다. 때문에 민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절대 호들갑이 아닌 체감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13년 이렇게 돈이 많든 계급 사회를 다룬 영화가 개봉했다. '닐 블롬캠프'감독의 <엘리시움>은 21세기 말을 배경으로 상위 1%의 사람들만이 병든 지구를 버리고 인공의 우주 거주지를 만들어 그곳에서 병들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 그 속에 이야기를 담아냈다.


영화의 주인공 '맥스(맷 데이먼 분)'에게 그곳은 자신의 소꿉친구인 '프레이(알리스 브라가 분)'와 함께 가고 싶은 이상향으로 여기게 된다.


공장장 : 들어가기 싫다면 다른 사람을 시킬 테니 사물함 비워.
맥스 : 너무하시네요.


그런 어릴 적 약속을 뒤로한 채 지구에서의 그의 삶은 매우 어두운 색을 뗬다. 돈이 곧 힘인 세상은 지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주인공 맥스 또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범법 행위에 거부감이 없었고, 이런 그는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찍힌 뒤였다. 그리고 이런 그를 더욱 옥죈 것은 사회의 시선이었다. 돈이 없는 노동자 신분의 그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일쑤였고, 위험한 일에 대해서도 단지 돈때문에 그는 주어진 선택권앞에서 억지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단지 영화 속 얘기가 아니다. 불과 일주일 전(23일)에도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소속 수리기사가 건물 외벽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던 중 떨어져 숨졌다. 이런 안타까운 사고 뒤로 열악한 근무환경과 더 뒤로는 돈이란 것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구의역 사고'가 일어난 지 불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러한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안전 문제속에서 그들은 단지 돈이란 것 때문에 함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은 매번 있었지만 바뀌지 않고 있다. 이런 사회구조 상황은 영화에서 매우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처럼 그려진다. 


영화에서 그는 결국 5일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고, 그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감정이 결여된 로봇이 전달해 주는, 마치 인간성이 사라진 세상이 마지못해 보상해주는 듯한 진통제 몇 알이 전부였다.


하지만 불법 이민자들이 우리 아이들이 사는 집에 들이닥치면
그들을 쫓아내는 건 여러분들이 아니라 바로 접니다


엘리시움의 국방부 장관인 '로데스 델라코트(조디 포스터 분)'는 지구에 사는 불법 이민자들이 엘리시움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죄책감을 느껴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하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내세우며 보호본능이라는 핑계로 그들이 돈을 기준 삼아 만든 계급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밝혔다. 그녀의 이런 모습에 대해 엘리시움의 대통령들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대상으로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만, 영화에서는 단지 독단적인 행동을 문제 삼으며 경고할 뿐이다.


이런 그녀의 사상은 영화 밖에서도 드러나있다. 2015년에 새로 생긴 신조어 중에 '휴거'라는 말이 있다. 임대 아파트로 알려진 휴먼시아의 앞글자와 거지의 앞글자를 따 만든 단어이다. 문제는 이것이 어른들 사이에서 사용되어지는 단어가 아닌 영화에서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아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에게 이미 돈이란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잘못된 방법을 각인시켰고, 아이들의 순수함이 이러한 옳지 않은 사회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즉, 영화에서나 보이던 돈이 만든 계급사회는 이미 우리 사회 내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맥스는 이 뿌리를 없애기 위한 모험을 펼친다.


저기서 여길 봐도 참 예쁘단다.
네 뿌리를 잊어선 안돼.


처음에 그는 단지 엘리시움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만이 엘리시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희생을 통해  지구의 모든 사람이 엘리시움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가슴속에 품고 있던 지구의 사진이 담긴 펜던트를 보며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뿌리는 99%의 지구에서의 하나의 인간이었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영화는 단지 돈이란 것이 그들의 계급을 나누고 그 결과로 돈에 의해 비인간적인 것이 보편화된 사회가 형성되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의 모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잃어버리지 않은 지구라는 뿌리를 되새김질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혹자들은 이런 돈이 기준이 되는 사회 속에서의 답을 돈을 버는 것으로 정해버리곤 한다. 때문에 돈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게 되었고, 그 사이 많은 가치들을 잃어버리곤 한다. 물론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돈은 살아가는데 어떤 곳이 든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세상을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된다. 영화에서 맥스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무너뜨리려 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돈이 기준이 되는 세상이다. 영화는 우리가 상위층의 1%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아닌, 99%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엘리시움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영화 속 세상은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였지만, 그것이 보여준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 어느 한 부분들의 모습들이다. 돈이 기준이 되고 이것이 곧 계급이 되어, 사람들을 돈을 미끼로 위험으로 내몰고 어느 곳에서는 아이들에게까지 이러한 계급을 세뇌시키고 있다. 영화는 맥스의 희생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엘리시움에 가는 것이 아닌, 모두가 엘리시움에 가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세상은 더 이상 돈이 기준이 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우리 세상은 어느새 영화가 묘사한 1%만을 위한 엘리시움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돈이라는 것을 더 이상 기준이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세상이 소수를 위한 엘리시움이 될지, 아니면 모두의 이상향이 실현되는 영화의 마지막 모습의 엘리시움이 될지는 앞으로의 우리들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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