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회사 일을 거들러 출근한 건 괜한 일이었나 싶기도 하다. 무려 8 년의 시간을 이어갈 줄은 몰랐다. 그 밤, 술김에 주고받던 한두 마디가 결국은 건들지 않았으면 좋을 부분을 건드렸고 잔뜩 독이 오른 남편은 다소 과장되게, 극단적인 표현으로 그때의 사업 고충을 내게 전했다. 온전히 다 믿은 것은 아니었다. 화가 발화되면 늘 그런 식으로 분출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다 화가 삭으면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먼저 청하지 않았으나 내가 먼저 선언했다. 내일부터 회사에 나가겠다고. 두 가지 마음이었다.
‘너도 나만치 못났구나.’
‘모른 척할 수 없다. 가족이니까. 동지니까.’
남편은 주 2,3회 정도만 출근해 주면 좋겠다고 했으나, 무슨 각오가 그리 대단했는지 매일 나가지 않으면 직원들과의 융화도 어렵고 업무상 효율도 떨어지니 매일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소규모 자영업자 대표의 아내가 하는 일은 대개는 재무관리라고 하기도 뭐 한 작은 범위의 경리 업무와 업무 환경 관리, 몇 안 되는 직원 인사관리 정도면 충분하다. 폭도 깊이도 소소한 수준이기에 굳이 외부 인력을 들이지 않고 그만큼의 인건비를 아끼자는 취지에서 아내는 출근을 시작한다. 가장 적극적인 방식의 내조가 아닐까.
당시 나는 두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몇 년간 운영하던 학원을 접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자기 계발 시간으로 맹렬히 활용하던 중이었다. 주 3회 두 시간씩 빠지지 않고 운동을 했고, 월 2회 요리 수업에 참석했으며, 친구들과 영어 원서를 읽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이내 시답잖은 대화를 콩글리쉬로 이어갔다. 비는 시간엔 주로 인간애와 연애에 관한 색깔 있는 책과 영화들을 풍성하게 흡수했다. 매일 출근하는 것은 그 모든 일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상하게 결연해져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직장인이 되었다.
조금 늦고 조금 빠른 출퇴근 시간 탓에 직원들에겐 반쯤은 놀러 다니는 여유로운 생활로 보였겠지만 한량하던 주부에게는 편한 길에서 고생길로 노선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는 국면 전환이었다. 늘 아래를 자청하며 남편보다 직원을 먼저 배려하려 노력했다. 가계부도 골치 아파 못 쓸 둔감한 경제 감각으로 꾸역꾸역 경리 업무를 보았고, 문구사와 우체국, 은행을 드나들고 도시락을 사 날랐으며 택배를 보내려 편의점을 오갔다.
겨우겨우 일을 꾸려가던 중에 홍보 카피를 쓰는 것은 적성과 취향에 맞는 유일한 일이었고, 디자인에 필요한 이미지를 서치 하는 일은 맞춤한 것을 비교적 잘 찾아내 나름의 뿌듯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자연스레 디자인 회의에도 참여해 적당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자잘한 디자인 작업을 내 선에서 처리해 준다면 디자이너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학원에서 포토샵과 일러스트 과목을 수강했고 긴 시간 들이지 않고 기초 과정을 마무리한 후 소소한 일거리들을 맡아 처리했다.
명함 디자인이나 소소한 광고 시안 등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남편이 개인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료를 만들기도 했고, 회사 작업 결과물을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도 내 몫의 일이었다. 별 거 아닌 일이지만 그 별 거 아닌 일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디자이너들은 아낄 수 있었고, 나에게는 다른 분야로 영역을 조금 넓혀가는 계기가 되었다. 작업 결과물 사진을 보정해 재미있는 글과 함께 회사 블로그에 올리는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회사 운영에 포스팅이 큰 도움이 된다는 남편의 부추김은 반쯤 직장인으로 살던 나에게 자긍심을 주기도 했다. 경리나 인사 업무만으로는 직장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온전히 채울 수는 없었으니까.
얼결에 시작한 일이지만 포토샵과 일러스트는 지금도 소소하게 잘 활용하고 있는 업무 툴이다. 사십을 넘긴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었으나 따라가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나이에 비해’라는 단서가 늘 따라붙긴 하지만 디자인 감각도 아주 없지는 않아서 역시나 나이에 비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도 하고 미미하게나마 실력이 조금 늘기도 했다.
나이는 많아져가고 언제까지나 남편의 회사만 도울 수는 없어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차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십을 넘어도 여전히 앞날은 확정적이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아무 일 하며 살고 싶지 않았고, 남을 위해 내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일’이 필요했고 그 중심엔 늘 책이 있었다. 책을 출판하고 싶기도 했고, 책방을 하고 싶기도 했으며 좀 더 크게는 출판사를 해도 좋지 싶었다. 회사 일도 익숙해지며 마음에 약간의 허기도 감지돼 새로운 공부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시작한 새 공부가 인디자인이었다.
좋은 강의가 즐비한 ‘한겨레 교육문화센터’에 교육비를 (국가 지원 없이) 온전히 다 내고 수강했다. 연배가 높으신 강사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매킨토시 컴퓨터인 ‘아이맥’을 처음 마주한 순간, 훕 들이마신 숨을 잠시 멈추었다. 별게 다 신기한 늙은 수강생이었다. 역시나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수강생 절반 이상이 내 나이 반쯤 돼 보였다. 다행히 자기소개 같은 건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해 편안한 채로 주 1회 세 시간씩 18시간의 인디자인 기초 과정을 마쳤다. 회사인 양재동에서 신촌까지 가는 데 한 시간 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데 근 두 시간이 걸리는 꽤나 고단한 여정이었다. 뭐 한다고 이러고 사나, 피곤에 절어 돌아오는 길엔 곧잘 자괴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과정 자체는 내내 흥미로웠다. 역시나 ‘나이에 비해’ 잘 따라간 편이고, 이따금 옆자리 젊은이보다 내가 더 빠르게 작업 결과물을 만들어낼 땐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끝끝내 무엇을 이루었느냐 물으면 답할 게 없으나 과정 자체가 자존감을 채워주기도 했고, 젊어지는 시간이었으며 배우는 자체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출간 방법을 찾지 못해 아직 움켜쥐고 있는 원고가 두어 개 있기도 하나 직접 해낼 만한 인디자인 실력은 사실 아니다. 책방을 터전 삼아 출판사를 겸업해 운영하고도 싶었으나 1인 출판 수업을 들은 후 내가 넘볼 영역이 아닌 것도 깨달았다.
배웠다는 자체가 뿌듯하고 배우는 과정 자체가 약이 되는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한 더디 늙는다. 아파도 덜 아프고, 무너졌다가도 금세 고쳐 앉을 수 있다. 인디자인 고급 과정을 붙여 배우지 않은 게 이제와 후회된다. 한겨레 교육문화센터 홈페이지에 접속해 봐야겠다. 강사님은 조금 더 연로하실 테고 수강생은 여전히 젊고 어려 내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친구들이 더 많겠군. 자기소개 안 하니까, 괜찮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