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여덟 개의 산을 보았다. 친구는 백만 년 만에 극장에 와본 것 같다 했고, 나는 백만 년 만에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친구는 '사람들이 버글대서 극장이 싫었는데, 이곳은 참 좋구나' 감탄을 했다. 내가 즐겨 가는 극장 중 사람들이 버글대는 곳은 거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즐겨보는 영화 중 사람들이 버글대는 영화는 없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친구는 예술 영화 상영 극장의 매너를 금세 배워 자막이 끝까지 다 올라가고 불이 켜질 때까지 움직이지도, 핸드폰을 켜지도 않았다. 혼자 보는 것에 익숙한 나 역시 나란히 함께 보는 것에 쉬이 적응했다. 좋은 영화를 좋은 곳에서 나누었던 좋은 시간. 친구야, 오래 기억할게.
줄거리 : 도시에 사는 '피에트로'와 산에 남은 유일한 아이 '브루노' 알프스에서 만나 친구가 된 두 소년은 자연을 누비며 우정을 나눈다. 그 후 성인이 된 '피에트로'는 아버지 '조반니'가 세상을 떠난 뒤 산으로 돌아오고 '브루노'와 재회한다
- 네이버 영화 -
'여덟 개의 산'을 여행하는 자와 중심 산의 정상을 지키는 자. 떠난 자와 남은 자. 현실의 삶과 지향하는 삶 사이의 간격을 조율하며 사는 일. 존재를 찾기 위해 떠나는 일. 지켜야 할 것과 버려도 좋은 것들. 애도하는 일. 소중한 것을 지키는 방식. 나는 어느 쪽인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살아갈 것인가. 남아서 잘 살 사람인가, 떠나서 내게 맞춤한 곳을 찾게 될 사람인가. 지켜야 할 사람과 기대도 좋을 사람 사람 사람.... 은 누구인가.
나는 산을 오르지 못하는 사람, 약해 빠지고 게을러 빠져서 결국 평지에만 머물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결국, '덜 살고 가는 사람'으로 규정할 수밖에. 여덟 개의 산 언저리를 맴돌며 영영 그렇게 미숙하게 살다 가겠지. 더 채우며 살겠다고 용쓰기보다는 덜 사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 보듬고 사는 게 나을 법한 나이에 와있다. 그래도 언제나 '산'을 궁리하며, 삶을 궁리하며, 존재를 궁리하며 걸을 수 있는 만큼만 한걸음 한걸음 걷는 일. '궁리'와 '걸음'으로 남은 생을 채우겠다고. 직관적 영화 후기니까 이렇게 직관적으로 중얼중얼, 적어본다.
*당장 책을 읽어보려 영화를 본 후 바로 서점에 갔으나 현재 절판 중. 도서관을 이용해야겠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우람하면서도 쓸쓸하고 고즈넉한 알프스의 풍광은 그 자체로 위대한 어떤 이의 삶 같았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려나. 풍경만으로도 경외감이 밀려오고 숙연해졌다.
울림이 큰 영화였다.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길어 올리는 영화. 질문을 던지고 답을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묻고 기억하고 수양하라. 읽고 쓰고 살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