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입니다.
그리스로 떠났다. 왜 그리스를 선택했어요. 그리스는 합리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 원시적이고 태생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행위에는 당연히 의도가 있을 것을 전제하는 의도없는 물음들을 뒤로 하기로 했다. 철학을 전공했으니 서양철학의 근원지를 한 번쯤 방문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허울 좋은 대답들을 할 수 있었지만 이유를 찾으려면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강박적으로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미 찾기와 이름 붙이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다가오는 감정과 감동을 우연에 맡겨보자는 마음이었다. 어느 곳으로 갈지, 어디에서 자고 먹을지 계획도 짜지 않고서 10일간 그곳에 머물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스로 떠나기 전 그녀는 공허했다. 대학에서 4년간 철학을 공부하며 경제적 부나 사회적 명예와 관계없는 가치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좇았다. 사회에 대한 경험도 자신만의 정의도 부족했던 그녀의 삶은 사회적 정의에 대한 고민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경제적 빈곤에 대한 사회구조의 모순을 고민했지만 정작 그녀의 삶은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대에 입학한 그녀에게 필요한 돈은 충분치는 않더라도 일상생활과 다소 간의 여흥을 즐기기에는 족한 것이었다. 피상적인 글들과 얕은 경험으로는 사회의 부조리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그녀는 왜 그런지도 모르는 끝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오랜 비행시간을 마치고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새벽 2시에도 체크인을 받아주는 숙소를 겨우 찾아내어 시내로 향했다. 새벽의 아테네 시내는 TV나 선배들의 페이스북에서 보아왔던 풍경과는 달랐다. 술인지 마약에 취한 남녀는 길거리에서 깊은 스킨십을 나누었다. 싸구려 그래피티로 가득한 지저분한 길거리, 무언가에 취한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숙소를 찾았다. 숙소에 도착해 걱정하는 남자친구와 전화를 마친 후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래도 이곳에 왔으니 아테네는 들러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에서 강박적으로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문화유산들을 방문했다. 살면서 다시는 오지 못할 수 있으니 보고 싶지는 않지만 봐야만 할 것 같은 것들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아크로폴리스마저 공사 중이었기에 그것을 둘러싼 철제 구조들을 보고 사진을 한 장 찍고서 중요한 과제를 마친 듯 뒤돌아섰다. 그녀의 원래 삶과 같은 익숙한 순간들이었다.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의 비석이 있다는 어느 한 공원으로 향했다.
걷고 있자 한 남자가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잘못 본 거겠지라고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 찰나에 말을 걸어왔다. HI. Where are you from? 낯선 이의 뻔한 질문에 뻔하게 답한 후 미소를 지어 보냈다. 185cm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마른 체구를 가진 퇴폐적인 눈빛의 남자였다. 썩 잘생겼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네 라고 생각하며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그 남자는 그 이후로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뻔한 수작이라는 여행객의 불신과 경계를 눈치챘는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엊그제 직장을 그만 두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명상하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해 걷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은 무엇이라고 말을 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그녀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 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경계를 풀었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와 같은 뻔한 말이 아닌 나는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라는 소개를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한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와 큰 공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공원에 있는 작품들과 비석들, 공원 내부에 있는 작은 미술관의 작품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자신의 집 근처나 학교에 있는 유형물들에 대해 모르는 그녀는 그가 꽤나 유식하다고 느꼈다. 긴 산책을 끝내고 예약한 투어 시간이 있어 이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스마트폰이 아닌 10여 년 전에나 쓸 법한 슬라이드 폰이었다. 그의 눈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