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간들이 기회로 이어진 순간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나는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컸고,
아이들을 두고 나만 무엇을 한다는 건 오랫동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유치원에 잘 적응한 이후에도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기에 맞는 엄마로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열린 문 하나가 있었다. 아주 조용하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온 기회였다.
나는 원래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을 참 좋아했다.
처음엔 아이들 책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림책은 오히려 어른들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짧은 문장이 품고 있는 섬세한 마음들, 보통의 하루를 낯설 만큼 다르게 바라보게 만드는 그림들,
책장을 덮을 때마다 남는 잔잔한 여운. 그건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는 위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숨결 같은 따뜻함이었다.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귀한 마음들을 조용히 건네주는 그런 책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는 내 마음을 유난히 오래 붙잡았다.
이 책은 일을 대단하게 말하거나 성공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자신의 일을 얼마나 정성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청소부 아저씨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일에 최선을다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예전에 일을 하며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렸다.
왜 그토록 일을 사랑했는지, 어떤 의미를 찾으려 애썼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충만했는지를.
그림책 한 권이 오래 묻어둔 나의 감정을 살포시 꺼내주는 느낌이었다.
이 책은 육아에 대한 시선도 바꾸어놓았다.
육아를 한다는 건, 단순히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세상이라는 큰 공간을 처음 소개해주고, 마음을 안전하게 붙일 곳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내가 매일 하고 있던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진 시간이었는지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나를 따뜻하게 적셨고, 이 위로를 혼자만 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림책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주었는데,
혹시 다른 어른들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그 무렵 코로나가 찾아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세상은 멈춘 듯 조용해졌지만, 오히려 그 시기에 작은 문이 하나 열렸다.
화상채팅 툴을 통한 연결의 흐름이 생겼고, 그 흐름이 내게까지 이어졌다.
도서관에서 <어른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마음산책> 강의를 맡아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온 것이다.
처음에는 설렘보다 놀라움이 더 컸다. “정말 내가…?” 하는 마음.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그림책을 집에서 읽어주며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잠잠히 접어두었던 ‘나’라는 목소리를 아주 조용히 다시 불러냈다.
<어른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마음산책> 강의는 주말 오후, Zoom으로 2시간씩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참 다양했다. 아이를 키우는 부부가 함께 화면에 등장하기도 했고,
식당을 운영하다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잠시 들어오신 분도 있었다.
대학생, 직장인, 결혼 전인 젊은 분들까지, 그림책을 잘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림책이 도대체 왜 어른에게 좋다는 걸까?” 궁금해서 오신 분들도 많았다.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쉬어가고 싶어서, 혹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리워서 들어온 분들도 있었다.
나는 대단한 정보와 지식을 주려하지 않았다.
그저 그림책을 읽어주고, 그 안에서 떠오르는 마음을 함께 나누었다.
“이 장면에서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하고 물으면, 화면 속 누군가는 조용히 웃었고,
누군가는 울컥했다며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그저 듣고, 고개 끄덕이고, 연결해주는 역할만 했지만,
그 시간이 나에게도 큰 힐링이었다. 마치 내 안에서 잊혀져 있던 작은 빛 하나가 다시 켜지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나는 다시 떠올렸다. ‘계획된 우연’이라는 개념을.
진로 심리학자 존 크럼볼츠가 말하길, 사람의 길은 계획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우연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 우연을 기회로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호기심을 잃지 않는 사람, 뜻밖의 흐름을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
작은 문이 열렸을 때 일단 한 번 들어가보는 사람.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그랬다. 그림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코로나로 화상 강의 흐름이 열린 것도,
도서관에서 연락이 온 것도 모두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 우연을 향해 내가 한 발 움직였기에, 그 문은 길이 되었다.
우연은 주어졌고, 선택은 내가 했다. 이 이론을 알고 나니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선명하게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육아에만 집중하며 ‘멈춰 있는 시간’이라고 여겼던 날들도
사실은 내가 새 길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던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조용히 믿고 있다.
인생의 많은 순간은 예고 없이 문을 열지만,
그 문을 받아들일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새로운 길은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연이 찾아오면 나는 그 문을 한 번쯤 밀어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또 다른 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나게 되겠지.
그렇게, 다시 시작된 나의 길은 지금도 천천히 이어지고 있다.
<잠시, 작은멈춤>
1. 내 삶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이 열렸던 순간이 있었나?
2. 그 기회를 바라보던 당시의 나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3. 지금 다시 문이 열린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은가요?
“우연처럼 보였지만, 돌아보면 내가 쌓아온 모든 순간이 자연스럽게 그 문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