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계를 존중하는 법을 알아가는 중
첫째아이가 커갈수록 나는 친구관계에 대해 더 많이 걱정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가진 관계의 미묘함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재미있던 기억도 많지만,
친구들과 얽혔던 일로 힘들었던 순간들도 선명하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았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자라던 시긴는 단순히 싸우는 수준이 아니라
요즘 말로 ‘왕따’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누군가가 장난처럼 “우리 누구 왕따시킬까?”라고 말하면,
그 말 한마디에 아이들의 세계가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단순한 다툼도 깊은 상처가 되고, 관계의 균열은 곧 마음의 균열이 되던 시기.
그전까지는 가족이 전부였다가, 어느 순간 친구가 세상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나이였기에,
친구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것 같다.
그때 느꼈던 외로움과 두려움, 상처의 여운은 어른이 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딸만큼은 그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유난히 앞섰다.
내가 겪었던 흔들림을 아이가 같은 방식으로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 마음이 나도 모르게 딸에게 향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자주 물었다.
“친구들이랑 잘 지내?” “혹시 싸운 건 아니지?”
“무슨 일 있으면 꼭 엄마한테 이야기해야 해.”
돌이켜보면 걱정이라기보다 내 어린 시절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이를 향해 기울어진 것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첫째가 친구와의 관계에서 작은 감정의 파동을 가져오는 모습을 보았다.
여자아이들의 관계가 그렇듯, 셋이 모이면 언제나 한 명이 남는 순간이 생겼다.
친한 친구 셋이었지만, 짝을 지어야 할 때는 꼭 한 명이 서운해지는 구조가 반복되었다.
마음이 잘 맞아도, 서로 좋아해도, 상황이 어쩔 수 없어도,
그 ‘한 명’이 돌아가며 상처받는 시간.
딸은 그 일이 싫어서 속상하다고 울지도 않았고, 크게 문제라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표정과 말투 속에 담긴 조그만 실망을 나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도, 괜히 내 가슴이 조여들었다.
내 아이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마치 예전의 나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던 즈음, 아이가 핸드폰을 갖게 되고 나는 더 자주 확인하게 되었다.
혹시나 아이가 상처받을 만한 말이 있는지,
다른 친구와 오해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작은 말투 하나에도 불안이 스며들었다.
‘아직 어려서 이런 건 엄마가 챙겨줘야 한다’는 나름의 합리화를 곁에 두고서였다.
반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조용히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가 휴대폰 비밀번호를 바꿨다.
처음엔 놀랐고 나는 반사적으로
“엄마는 너를 보호해야 하는 사람이야. 이런 건 말해줘야지”라고 말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말은 불안한 마음을 엄마의 역할로 포장한 말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아이가 다시 비밀번호를 바꾸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장면이 내 마음을 멈추게 했다.
혹시 내가 불편한 엄마였던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려고 했던 건 아닐까.
아이의 세계를 내가 대신 관리하려 했던 건 아닐까.
그 순간 나는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아이가 비밀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던 거구나.
그건 나를 밀어내는 행동이 아니라 자라나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
아이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모든 것을 나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내가 걱정하는 일들이 아이에게 반드시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혹시 생기더라도, 그걸 이겨낼 힘이 아이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믿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연습 중이다.
불안 대신 믿음을 고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우는 중이고,
도와주고 싶어도 한 발 물러서 보는 법을 아주 천천히 익히고 있다.
아이의 세계가 확장될수록 나는 한 발 뒤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다.
놓아준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세계를 인정하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가끔은 생각한다.
언젠가 아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복잡한 관계 속을 스스로 걸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대신해줄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서 있는 세계를 믿어주는 것,
힘든 순간이 와도 버틸 수 있다는 믿음을 건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속에서 작은 결심을 되뇐다.
아이의 세계를 지나치게 들여다보지 말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불안을 들이밀지 말자.
대신 아이가 자신만의 마음을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믿어주자.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거리에서 나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그 날들을 기다리자.
아이가 비밀번호를 바꾸는 작은 순간조차도,
그 속에는 자라나는 마음의 방향이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잠시, 작은멈춤>
1. 요즘 아이에게 생긴 ‘아이만의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요?
2. 나는 어떤 순간에 아이를 보호하고 싶어졌고, 그 마음의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요?
3. 내가 아이를 믿어주기 위해 무엇을 ‘조금 덜’ 하거나 ‘조금 더’ 해볼 수 있을까요?
“모든 걸 알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