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아이가 자기 걸음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등교와 하교를 함께 해주는 일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초등 1학년 때는 더더욱. 새로운 환경에서 아이가 느낄 낯섦을
내가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가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초반 몇 달은 일부러 일을 잡지 않았다.
아침마다 손을 잡고 학교까지 걸어가고, 하교 시간에는 교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려주는 시간.
그게 엄마로서 내가 꼭 해주고 싶은 일이었다.
하교를 함께한 날들은 지금도 내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아이가 친구들과 뛰어나오면 나는 늘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동안 나는 잠시 엄마 역할에서 벗어나
친구 엄마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어떤 날은 아이가 친구 둘을 데리고 “엄마, 편의점 가자!” 하고 달려오면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다.
손과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히고 깔깔대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이 시간을 위해 일을 비워둔 게 참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시간이 길게 남아 있던 날에는 둘째와 자전거를 타거나 동네를 산책하곤 했다.
그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해가 기울기 전 잠깐의 여유였다.
아이가 페달을 힘껏 밟으며 “엄마, 나 엄청 빠르지” 하고 외칠 때면
이 아이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빠르게 자라고 있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음이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적응 기간이라 그런지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졌다.
“엄마, 오늘 어떤 친구가 울었어.” “오늘은 누가 학교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고 했대.” 하며
친구들의 감정을 그대로 품어오는 날도 있었다.
마치 아이가 새로운 세계를 통째로 가방에 담아와 나에게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뭐가 제일 좋아?” 하고 물으면 아이는 늘 밥이라고 대답했다.
입학 후 며칠 동안은 급식 이야기만 했다.
어떤 반찬이 나왔는지, 얼마나 맛있었는지, 어떤 건 두 번이나 먹었는지 신나게 설명했다.
낯선 공간일 텐데 음식 맛이 느껴진다는 건 그만큼 잘 적응하고 있다는 뜻 같아 안심이 되었다.
학교가 엄청 크다고 자랑하던 날도 있었다.
유치원도 꽤 큰 편이었지만 초등학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서인지,
복도도 길고 교실도 많고 체육관은 우주만큼 크다고 자랑스레 설명했다.
어떤 날은 급식실에서 우연히 누나를 만나 반가웠다고 이야기했고,
태권도장에서 함께 다니는 형이 복도에서 이름을 불러줘 신났다고도 말했다.
들을수록 이야기의 종류가 많아지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고,
내 일이 조금씩 바빠지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등하교해야 하는 날들이 생겼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사실 그날 하루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 쓰였다.
아이가 괜찮다 말해도 왠지 미안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일이 조금 여유로워진 어느 날,
나는 다시 등교를 함께 해주겠다고 말했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안 나와도 돼. 나 혼자 갈래.”
한순간 귀를 의심했다.
늘 내 손을 잡고 걸어가던 아이가 어느새 혼자 가는 게 더 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친구들도 다 혼자 가고, 자기도 이제 그러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엄마가 같이 가줄게”라고 했더니,
아이는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은 안 잡을 거야. 그리고 가방도 내가 들 거야.”
무겁기만 한 책가방과 준비물 가방을 양손에 번갈아 들고 가면서도
내가 들어줄까 물으면 “괜찮아, 나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아이.
그 모습이 너무나 씩씩해서,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동시에 올라왔다.
기특함과 아쉬움이 겹치고, 자랑스러움과 낯섦이 섞이는 감정.
“벌써…?” “이렇게 큰 거야…?” “언제 이렇게 내 손을 벗어났지…?” 하는 생각들이 밀려왔다.
마냥 아기라고만 생각했던 우리 집 막내가 어느새 자기 걸음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아이가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알았다.
어릴 때 꽉 잡아주던 그 손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떠나 앞서 걷는 날이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더라도,
그건 아이 마음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는 신호라는 것을.
언젠가 아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더 큰 책임을 마주하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그때 나는 모든 순간을 함께 해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아이가 혼자 가겠다고 말한 그 한마디가
마냥 서운함으로만 남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아이는 더 멀리, 더 크게 뻗어 나갈 것이고
나는 그 길의 모든 순간을 함께 걷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떠나는 첫 장면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했다.
<잠시, 작은멈춤>
1.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어? 벌써 이렇게 컸나?’ 하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2. 요즘 아이의 말투나 표정에서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나요?
3. 예전이라면 나를 부르던 자리에서 이제는 조용히 혼자 있던 아이의 모습이 있었나요?
“손을 놓는 순간은 멀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걸음을 찾아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