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웃을 수 있다는 작은 기적
출장을 떠나는 날은 늘 비슷한 패턴이지만, 그중에서도 가끔은 새벽에 출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집 안은 적막하고, 나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캐리어를 끌기 전, 문틈을 살짝 열어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꼭 확인한다. 뽀얀 얼굴이 베개에 잠겨 있고, 두 아이가 자는 모습은 그 짧은 순간에도 마음을 붙잡는다. 괜히 얼굴을 살짝 만져보고 싶어 손끝만 조심히 대보고, 그제야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문을 닫는다.
얼마 전에 다녀왔던 부산과 경주로 이어지는 3일 출장 일정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아침 일찍 집을 나가, 마지막날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이서인지 실제보다 더 길게 4일, 5일처럼 느껴졌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마음까지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강의 후 혼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문득 집 생각이 괜히 크게 밀려왔다. 그래서 습관처럼 홈캠을 열어 보곤 했다. 큰 변화는 없는데도, 거실의 조명, 소파에 놓인 담요, 아이들이 잠깐 지나가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면 그냥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이들이 집 안에서 움직이는 모습 하나만 봐도 “아, 저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이제 세상 어디보다도, 우리 집이 가장 좋다는 걸.
사실 부산 일정이 잡혔을 때, 오랜만에 가는 부산이라 강의가 끝나면 맛집을 찾아가고, 바닷가를 걸으며 작은 여행처럼 하루를 보내볼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막상 오전 강의를 마치고 오후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지자,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많고 활기찬 부산역 주변의 풍경도, 눈앞에 펼쳐진 바다도 나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혼자 카페에 앉아 잠깐 숨을 고르는 동안, 계속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곳은 혼자보단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날은 처음으로, 어떤 공간은 혼자일 때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일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걸 조금 더 깊게 실감했다.
작년에 갔던 제주 출장 때는 그와 또 다른 감정이 나를 흔들었다. 오랜만의 제주라 설렘도 있었고, 비행기까지 타고 다녀오니, 남편에게 부탁하고 하루 더 머물며 작게나마 여행 계획도 세웠다. 산을 좋아하는 내 마음 때문에 한라산도 꼭 오르고 싶었다. 강의를 마친 다음 날 혼자 한라산을 오르며 느꼈던 자유는 오랜만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킬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고, “나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긴 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려오는 길의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마음 한쪽은 공허했다. 여행은 즐거운데, 그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더 허전하게 했다.
다행히 가족들이 내 제주일정과 함께 맞추어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어, 한라산을 다녀온 다음날 제주공항에서 가족들과 마주했다. 나는 뜻밖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단 3일 뿐이었는데도 아이들을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걸까. 아이들이 “엄마!” 하고 달려오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보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 되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변해버린 것이다.
예전에 혼자 살던 시절에는 오히려 출장 가는 것이 좋았던 때도 있다. 비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새로운 환경에서 하루를 보내는 편이 더 나았으니까. 혼자 먹는 저녁도 익숙했고, 호텔 방의 조용함도 편안했다. 그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내 자리가 있는 곳’,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 되었다.
출장을 마치고 집 근처까지 와서, 아파트의 불빛이 먼저 보이면, 그 불빛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도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문을 열면 아이들이 뛰어오거나 무심하게 “왔어?”라고 말하는데, 그 짧은 말 한마디가 하루의 무게를 뚝 떨어뜨린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늘 빨래는 쌓여 있고, 설거지도 산더미처럼 있고, 바닥엔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고, 이곳저곳 어질러져 있다. 완벽한 집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어질러짐이 나를 안정시키는 것 같다. “아, 내가 돌아왔다.” 이 느낌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요즘은 퇴근 후 집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자주 느낀다. 회사도, 출장도, 강의도 모두 내 삶의 중요한 일부지만, 결국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건 집 안의 작은 풍경들이라는 걸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있는 집. 나를 기다려주는 집. 내가 돌아갈 곳이 있는 집. 힘든 하루 끝에 다시 웃을 수 있게 하는 곳. 퇴근 후의 작은 기적은 멀리 있지 않았다. 늘 내 집 문 앞에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작은멈춤>
1. 일과 거리, 피로 속에서도 내가 그리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2. 출장이나 퇴근길에 문득 떠오르는 ‘집의 장면’은 무엇일까요?
3. 집이라는 공간이 내 삶에서 어떻게 의미가 달라졌을까요?
“문을 여는 순간 알게 된다. 집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준 마음들로 따뜻해진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