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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Aug 28. 2022

미안해, 나는 아스퍼거야.

남친의 아스퍼거증후군 커밍아웃

"미안해, 멈춰봐. 일단 거기 서봐. 잠깐만. 내가 태워줄게. 가도 좋으니까 내가 집까지 태워줄게. 내가 너를 화나게 한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어. 그래도 무조건 내가 미안해. 너를 화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어.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원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을 몰라. 나는 아스퍼거야."


"아스...뭐?"


"아스퍼거 신드롬이라는 게 있는데... 자폐의 일종인데... 그게... 아스퍼거들은 다른 사람들 마음을 읽을 줄 몰라. 핑계 대는 건 아니고... 진짜 네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 정말 미안해. 내가 아스퍼거라서 그래. 그니까 제발 내가 데려다주게만 해줘."


몇 번째 데이트였을까? 연애 초기 시절이었다. 퇴근길에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밥을 끝까지 먹고 싶지도 않았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별 희한한 인간을 다 보겠네. '


식사 도중 식당을 뛰쳐나와 성큼성큼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갔다. 남자친구가 따라나와 나를 붙잡았다. 욕을 한바탕 해주려고 그를 뒤돌아봤는데 그가 울고 있었다. 데려다줄테니까 차에 타라며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울며 사정했다.


'이건 또 뭐지... 얘 왜 울지... 아스 뭐? 버거? 뭐를 갖고 있다고?' 


일단 다 큰 남자가 우니까 순간 너무 당황했다. 일단 그의 차를 탔다. 기껏 붙잡아 놓고 집에 가는 길 내내 그는 말이 없었다.


'대화할 시간을 벌려고 나를 태워주겠다고 한 거 아닌가? 뭘 물어보든가 해야될 거 아냐. 왜 또 아무 말이 없지?' 


식당에 이어 차에서도 불편한 침묵은 이어졌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장난하나 진짜. 이럴 거면 굳이 왜 붙잡은거야?' 


그의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 황당했다. 이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그의 차에서 내렸다. 집에 들어와서도 감정이 가라앉질 않았다. 생각할 수록 어이가 없었다. 


'이 인간은 뭐지?' 


머릿 속에 수많은 의문들이 일었다. 혼자 오도카니 앉아 그날 하루를 복기해보았다. 


당시 난 호주 브리즈번 시티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커피와 음료뿐 아니라 즉석 샌드위치나 파이, 소세지롤 같은 테이크아웃 음식도 같이 파는 곳이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출근길에 커피와 아침식사를 사가는 주변 직장인들로 붐비는 가게였다. 


보통 오전 8시에 출근했다. 나를 반기는 건 꼭두새벽부터 출근해서 핫푸드를 조리하는 사장님 부부가 쌓아놓은 설거지 더미였다. 한바탕 설거지를 끝내면 샌드위치 재료로 쓰일 양상추와 당근 같은 채소를 손질하는 것이 내 아침 루틴이었다. 


손님들이 몰리면 커피만들고 서빙하느라 프렙할 시간은 전혀 없다. 손님들이 밀어닥치기 전, 단 30 분 동안에 설거지와 샌드위치 프렙을 다 마쳐야 했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급했다. 급기야 그날은 양상추를 썰다가 내 손꾸락도 썰어버렸다. 왼쪽 검지 손가락을 크게 벤 것이다. 손톱 절반이 몽창 날아갔을 정도니 피가 엄청 쏟아졌다. 여자 사장님이 달려와 뭔가 하얀 파우더를 뿌려서 지혈을 해주셨다.  


원래 덜렁이라 손에 상처가 많은 편이라 이 때도 '그냥 또 다쳤네.'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장님이 벌벌 떠신다.  


"무섭지? 나도 무서워." "Are you scared? I am scared, too."  


사장님이 무섭다니까 갑자기 나까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베인 손가락으로 온 몸의 에너지와 피가 같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사장님 뭥미. 어른이면 의연해야죠. 왜 없던 겁까지 꺼내 주는거에요.'


내 멘탈이 나가는 걸 눈치챈 사장님이 나를 소파에 누이고 쉬게 해 주셨다. 피가 멈추지 않으면 피크타임 손님만 쳐내고 병원에 가자고 하셨다. 30분 정도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핏기도 돌아오고 상처부위에 피도 잦아들었다. 슬슬 쉬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걸 보니 제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줄줄이 밀려드는 손님들의 주문내용이 들린다. 


"플랫화이트, 흑설탕2스푼, 너무 뜨겁지 않게 주시고요. 우유거품 전혀 없게 해주세요."

"Can I plz have a flat white with 2 brown sugars, not too hot, with no foam at all on the top?"


'저거 저거 옆 집 출력센터 에이미 목소리네. 내가 없어서 구구절절 지 진상취향 다 말하고 있구나. 사장님은 에이미 커피 만들 줄 모르는데...'


손가락에 붕대를 한겹 더 칭칭 감고 위생장갑으로 무장한 채로 벌떡 일어났다. 딱 30분 쉬고 평소와 똑같이 근무했다. 노동자의 애환이다.


손꾸락을 자른 그날도 남자친구는 우리 카페 앞에서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즈음이 사귄 지 첫 달, 감정이 한창 불타오를 때였다. 주말 데이트는 당연했고 평일에도 거의 매일 만났다. 브리즈번 시티에는 주차할 곳이 없기에 주차가 가능한 상권인 '싸우스뱅크'가 우리의 주요 데이트 장소였다. 도장깨기 하듯 순서대로 싸우스뱅크 식당을 탐방하고 브리즈번 리버를 따라 걷기도 하며 꽁냥꽁냥 놀다가 헤어지곤 했다. 


여느 때 처럼 남자친구의 차에 올랐다. '하우아유 아임 파인땡큐 엔유?' 일단 반갑게 인사를 하고 덧붙였다. 붕대감은 손가락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 사고가 좀 있었어. 양상추 썰다가 손가락을 베였어." 


"Are you OK?" "아유 오케이?"


"Yes, I am OK." "예스 아임 오케이."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에게 그 날은 무척 힘든 하루였다. 위로가 필요한 그런 날이었다. 


'괜찮다.' 는 나의 대답에 남자친구는 빈정거렸다.


"Did you make bloody sandwiches all day then?" "그래서 오늘은 하루 종일 피나는 샌드위치를 만들었겠네?"


"What? Bloody sandwiches??!!" "왓??!! 피나는 샌드위치라고??"


너무 황당했다. 괜찮냐는 그의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하고선 내가 예상한 다음 대화의 흐름은 대충 이런 거였다.


그: 괜찮아?

나: 응.. 괜찮아.

그: 약은 발랐어? 약 사러 갈까? 병원에 가볼까?

나: 아니, 괜찮아. 사장님이 약 다 발라줬어. 걱정 안 해도 돼. 저녁 먹으러 가자. 


''블러디 샌드위치' 라니. 이게 말이여, 방귀여. 피를 너무 흘려서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는데... 붕대에 아직도 피가 흥건히 새어 나와있는 걸 보고도 저런 소리를 하나.'


내 상태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바로 농담을 던진 그의 행동이 너무 무례하게 느껴졌고 기분이 나빴다.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하니 그도 말을 안 했다. 내 기분이 상했다는 걸 눈치챘을텐데도 이유를 묻거나 나를 달래려 하지도 않았다. 싸우스뱅크에 도착해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 중에도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이럴 거면 둘이 왜 마주 앉아있나. 내가 말을 안 한다고 지도 말을 안 하나. 지가 이상한 농담을 해서 내가 삐쳤는데 지는 왜 말을 안 하는 거지. 왜 그러냐고 한번 물어만 줘도 금방 풀릴텐데. 내가 말을 안 해서 되려 자기가 화가 났나. 아니면 나를 완전히 무시하나. 이제 내가 싫어졌나.'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내가 팍팍 내는데도 무반응인 남자친구였다. 남자친구가 철저하게 내 감정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생각까지 들다 보니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단 생각이 들었다. 


뛰쳐나온 나를 붙잡아 집에 태워만 주게 해달라고 눈물로 사정하더니 막상 또 차 안에서는 묵언수행이 이어진 것이다.  


'뭐지? 얘는 뭐지..?'


생각할수록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 아까 뭐라고 했더라. 무슨 버거, 아스버거, 아스퍼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거 때문에 자기가 내 마음을 모른다고 했지. 야! 나는 그 버거 없는데도 네 마음을 모르겠다. 서로 마음 모르는 것은 피장파장 아니냐............. 일단 그 버거가 뭔지 찾아나 볼까......'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브리즈번 시티 도서관에서 인터넷 검색 결과를 한참을 읽었다.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한 책도 한 권 빌렸다.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disorder) 


아스퍼거 증후군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여러 임상 양상 중 하나입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비정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및 제한되고 반복적인 행동 문제를 보입니다. 행동이나 관심 분야, 활동 분야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인지 발달 및 언어 발달이 상대적으로 적게 지연되어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래보다는 어른과 어울리거나 홀로 지내는 것을 선호합니다. 경직된 사고방식과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향이 합쳐져 오해를 사고, 이로 인해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처: 서울아산병원 질환백과 https://www.amc.seoul.kr/


영문과 다니면서 전공책도 원서말고 번역본으로 읽은 농땡이였는데 남자친구가 영어공부를 시켜줬다. 빌려온 책을 꾸역꾸역 읽고 나니 그날의 미스터리가 어느정도 풀렸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양상 중 하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신체기능과 지능이 정상 범주에 속한다. 겉보기에는 비장애인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사회성이 극도로 결여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큰 특징 중 하나는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인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상대와의 대화 맥락에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기 때문에 이들은 살면서 친구를 사귀거나 대인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을 향한 감정이입이 불가능하고 공감능력이 없다. 눈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배려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공감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를 해석할 때도 은유나 비유 같은 숨겨진 표현이나 함축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한다. 단어나 문장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이해한다. 예를 들어 반어법으로 '잘했다~', '잘났네 아주~'라고 비아냥 거렸다고 치자.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잘했다.' 는 문자 그대로의 뜻만 이해하기에 이를 칭찬으로 들을 수 있다.


사실 남자친구는 그 날 나보다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남자친구가 "아유 오케이?" 라고 물어서 내가 "아임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내가 괜찮다니까 괜찮은 걸로 받아들였다. 웃자고 가벼운 농담을 던졌는데 내가 갑자기 화를 내고 입을 닫아버리니 그는 엄청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살면서 늘 그랬듯 자기가 또 무언가 말실수를 해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 까지는 안다. 하지만 상호작용 기술이 부족한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을 수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겠지만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뇌활동이 정지된다. 당황하면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한고 불안감도 크게 상승한다. 실수를 만회하려고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봐 두려움도 크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항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낸다.    


그 와중에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떠나버린 것이다.


'아, 끝나버렸구나. 나는 이 여자를 다시는 못 보겠구나.'


극도의 좌절감에 멘탈이 붕괴된다. 눈물까지 터졌다. 너무 절박한 나머지 전혀 계획에 없던 아스퍼거증후군 커밍아웃까지 해가며 길거리에서 나를 붙잡은 것이다. 


요 며칠 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더 큰 혼란을 겪고 있을 그를 구해주어야 했다. 그의 집으로 찾아가 말없이 내가 읽었던 아스퍼거증후군에 대한 책을 내밀었다. 


"I can eat now." "이제 밥 먹을 수 있겠네."


세상 해맑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 커플에게 소중한 장소, 싸우스 뱅크. 사진출처: https://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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