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늘 최전방에 서있다.
언니와 엄마는 원래도 뚝딱이는 사이였는데 언니가 사춘기 때는 갈등이 극에 달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에만 관심이 없을 뿐 상식과 규율의 테두리 내에서 성실한 생활을 했던 언니가, 고등학교 때는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둥 우리 가족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반란을 일으켰다.
"학생이 도대체 밤 10시까지 무얼 하고 돌아다니느냐."
현관에 들어선 언니를 향한 엄마의 외침으로 모녀전쟁은 시작된다. 적어도 주 3회는 발발하는 모녀전쟁의 주요 레퍼토리는 공납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녔던 엄마가 (엄마 눈에는 마냥) 등 따습고 배부른 딸에게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이러냐."
고 따지면 등 따습고 배부른 게 전부가 아닌 딸은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라며 응수하는 흐름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타 지역에서 일하고 계셨고 남동생은 너무 어렸기에 이 환란을 정리할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매일 해가 지면 언니가 일찍 집에 들어오길 빌었다. 조용히 빨리 들어오지 않을 거면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나서 언니가 아예 사라져 버리길 빌었다. 언니 때문이 집이 매일 시끄러워지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고, 매일 힘들게 식당 일하는 엄마의 고생이 언니 눈에는 왜 보이지 않는지 정말 의아했다. 엄마가 이 이상 뭘 더 해줘야 되는지 언니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언니의 사춘기를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지켜본 나는 사춘기 없이 그 나이대를 넘겼다.
생각해 보면 언니의 사춘기 이전에도 언니와 엄마 사이에 이미 서먹한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등에 업혀 (때로는 방치되어) 엄마의 일터를 함께 오가며 오롯이 엄마 손에 자란 나와 달리, 언니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친할머니가 키워주셨다.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조부모님 댁을 떠나 부모가 사는 원가정으로 돌아온 언니는 잘 웃지 않는 아이였다. 언니는 나처럼 스스럼없이 엄마를 대하지 못했고 여장부 같이 괄괄한 엄마의 성격을 무서워했다. 집안의 첫 손녀로 할머니께 극진한 공주 대접을 받고 자란 언니는 '오냐오냐' 과잉보호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반면에 둘째인 나는 하루 종일 혼자 놀이터에서 흙을 파먹으며 노는 방임에 가까운 사례였기에 어린 언니가 원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꽤나 힘들었을 것 같다. '어머니회' 날 학교를 방문한 엄마에게 언니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할머니가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학교에서 종종 운다고 전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부모와 자녀 관계도 가까이 함께한 시간과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 자매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엄마의 베프 자리를 둘째 딸인 나 대신 장녀인 언니가 차지했다. 일생을 고향에서 살아온 언니는 유아기 시절 잃어버린 6년을 다 메꾸고도 몇 배의 세월을 부모님 곁에서 함께한 반면,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떠나 명절에나 엄마를 보는 손님 같은 딸이 되었다.
'둘째는 애가 변했다.'라는 게 엄마의 말이다. 자랄 때는 항상 엄마의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던 친구 같던 둘째 딸이 서울로 대학 가서 서울 새침데기가 되더니, 이제는 외국인이랑 결혼해서 개인주의 외국년이 다 되었단다. 반면에 엄마와 곁에서 애증을 나누며 함께한 세월이 누적된 데다, 고 3 때 일찍 취업한 언니는 진작에 사회생활의 쓴 맛을 본 지라 한꺼번에 왕창 철이 들었다. 내가 집 떠나 변질된 타락천사형 자식이라면, 언니는 성인이 되어 효녀 심청이로 거듭난 대기만성형이다.
엄마의 암투병 과정에서 언니는 몇 번이나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고향 종합병원 의사의 입에서 '폐암'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들은 것도 언니였고, 엄마가 항암치료 차, 서울에 머무는 동안 뇌경색으로 쓰러져 있던 아빠를 발견해서 119를 부른 것도 언니였다. 우리 가족 모두는 나중에서야 언니의 입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언니의 심장을 관통한 총알이 나머지 가족에게 닿을 때는 이미 힘이 빠져 있기에 그 충격이 처음만 못하다. 전방에서 제일 먼저 총알을 맞는 언니만 매번 죽어난다.
질풍노도의 시기의 언니와 작금의 효녀 심청이는 언뜻 이질감이 들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언니는 늘 K-장녀 노릇을 해왔다. 언니와 두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껏 언니의 이름을 부르거나 언니에게 '니가', '너가'라는 말도 써본 적이 없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우리 삼 남매 사이 위계질서를 명확하게 지키도록 했고 맏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언니는 나와 남동생에게 명확하게 '윗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언니가 싸운 적이 없다. 윗사람인 장녀에게 아래 동생들이 말대답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애초에 언니와는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 때 친구들이 자신의 언니와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거나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대등한 싸움'을 하는 걸 볼 때면 내 눈에는 그런 모습들이 늘 신기했다.
엄마와 언니의 충돌도 어찌 보면 권력자들끼리의 충돌일 수도 있다. 언니가 자식 중 최고 권력자로서 기존 권력자인 엄마와 전쟁을 통해 통금시간을 늘려놓고, 귀를 뚫고, 삐삐를 사고 휴대폰을 사면 한낱 중생인 나와 내 동생은 언니가 앞서 피의 투쟁으로 일궈놓은 혜택들을 나이만 차면 날름날름 공으로 받아먹었다. 학생이 도대체 밤 10시까지 무엇을 하며 돌아다니냐고 언니를 쥐어박던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자정이 되어 귀가해도 그러려니 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언니는 총알받이였다.
엄마는 암선고를 받고 나서 결혼 후 처음으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 언니는 이틀에 한번 꼴로 엄마 집을 찾아가 재래시장에서 같이 장을 보고, 시장 입구 단골 카페에 들러 반나절이 넘게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신다. 엄마는 엄마보다 전업주부 경력이 긴 선배인 언니에게 서양식 샐러드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때가 잘 진다는 세제를 추천받아 대량 구매해서 절반씩 나누어 갖기도 한다. 엄마가 3주마다 서울에 올라와 나와 같이 입원할 때면 모녀 상봉 후 얼추 2시간만 지나면 할 말이 소진되어 2박 3일 간 묵언수행을 하는데 언니랑은 이틀에 한번 봐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언제든 병세가 악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있지만, 엄마가 더 이상 일하지 않고 여유로우니 정말 좋다며 '내 꿀친, 정희 씨'로 엄마를 칭하는 언니를 보니 나의 현실 두뇌가 또 과하게 작동이 된다.
'엄마 가고 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언니야.'
얼마 전 불현듯 지인 한 명이 떠올라서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주고받은 일이 있다. 몇 년 전, 그분의 친정어머님이 췌장암 진단을 받으셔서 본인이 간병을 하기로 했다며 한동안 온라인 모임 등에 참여를 못 할 것 같다고 인사를 나누고는 연락이 끊겼던 것이다. 당시는 남의 일이던 친정엄마의 암투병이 이제는 내 일이 되고 보니 지인과 어머님의 안부가 너무 궁금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반갑게 맞아준 지인은 곧이어 어머님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어머님은 췌장암 말기로 8개월 남짓 투병 후 소천하셨다고 한다. '살민 살아진다.'라고 잘 지내고 있다고 씩씩한 목소리를 내었다. 친정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일단 실감이 나지 않고 특히 이전에 살던 친정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더니 자신의 일상에 엄마를 상기시키는 부분들이 없어서 더 수월하게 매일을 지켜가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친정동네에 살았다면 집 안팎으로 어딜 가든 엄마를 마주해야 돼서 더 힘들었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갓 발들인 세상을 먼저 살고 간 선배인 그 지인에게 요즘 내가 너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있잖아요, 엄마 진단받은 이후로 한 번도 통잠을 잔 적이 없어요. 신생아도 아니고 항상 새벽 3시에 눈이 떠져."
"응, 알죠. 알죠. 그렇죠."
"그리고 내가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뭐 일하고, 애들 챙기고 해야 될 것들은 다 하긴 하는데, 뭐라 그럴까? 정신이 뿌옇다고 해야 되나. 그리고 발이 땅에 안 닿여있는 느낌이에요. 항상 붕 떠 있는 느낌이고, 불안해서 그런가. 계속 뭔가 찝찝하고......붕뜬 희미한 느낌인데."
"응, 알죠. 알죠. 그렇죠."
"그니까 이 상태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없어져요? 다시 이전처럼 찝찝한 게 없는 상태로 돌아가나요? 붕떠 있는 상태가 없어져요?"
"네, 없어져요. 괜찮아져요.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런 느낌은 없어졌어요.
그런데 쌤...... 찝찝한 것도 없는데, 엄마도 없어.
다 없어요. 그게 문제야. 흑흑"
살민 살아질 뿐 의연해 보이던 지인도 괜찮은 게 괜찮은 게 아니었던 거다. 엄마 없는 세상이 이전과 똑같을 순 없는 거다.
엄마가 떠나면 어떨까? 성모병원 지날 때면 너무 마음 아프겠지? 따위의 상상을 하다 보면 그 끝이 언니에게 머문다. 나는 일상에 엄마가 없지만 언니는 그녀의 세상 전부에 엄마가 있다. 언니는 숨 쉬는 횟수만큼 엄마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상기될 때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엄마가 떠난 뒤에도 언니는 여전히 최전방에 서서 가장 큰 세기의 슬픔을 받아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