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편안함에 이르렀나

느림을 지키기 위해 쓰는 기록들

by 별향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에서, 삶의 어려운 순간들을 버텨낸 주인공 지안을 우연히 마주친 또 다른 주인공 동훈이 묻는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그리고 지안이 대답한다. ‘네’. ‘네’.

어렸을 때의 나는 빨리 나이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지금보다 편안함에 이르지 않을까도 싶었다. 생을 살아오며 예민함 때문에 혼자서 운 밤이 많았다. 감각은 열려 있고, 마음은 얇았다. 타인의 불안이나 슬픔, 어색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굳이 무언가 하지 않아도 그 감정이 내 안에서 요동쳤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있으면 쉽게 지치고는 했다. 내 안의 선인장 같은 가시가 누군가를 찌르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했다.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나의 표정이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봐. 그런 이유로, 어떤 시기에는 둥글둥글한 사람처럼 굴기도 했다. 활발하고 털털한 모습으로 나를 포장하기도 했다. 그때 나를 알던 이들 중엔 지금의 나를 전혀 다른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씩 알게 됐다. 가질 수 없는건 동경으로 남기고, 내가 가진 것들에는 집중하고 아끼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는 걸. 그 과정 속에서 예민함은 조금씩 무뎌지기도 했고, 나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방법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반경 안에 들어오면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 그래서 여전히 많이 다치고 아파하는 사람.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다, 몸보다 빨리가는 마음을 따라잡지 못해 병이 나는 사람. 삶의 소소한 순간들을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여전히 가볍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위로나 안정이 필요한 이들이 곁을 찾아왔다.


세월이 흘러, 삶의 어느 언저리에서는 드라마의 지안이처럼 편안함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기를. 그 대답에 대해서는 삶을 살아내는 동안 부딪히고 흔들리며, 조금씩 더 체득해야겠지. 나는 계속해서 흔들리겠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도 숨 고를 자리를 찾아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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