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커먼즈(commons)" 기반의 유기농 전환과 확장 사례 분석
개발도상국은 여러 이유로 농업 분야가 국가 GDP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농업은 심화하는 기후 위기와 관행농업의 한계라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습니다. 또한, 'USAID 폐쇄, 개발협력 축소, 자국주의 ODA로 전환'이라는 세계적인 악재 속에서 소농이나 취약계층은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저 또한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수 종자와 비료, 최신 농업기술을 보급했지만, 이 지원이 끝난 후 이들은 과연 주인의식을 갖고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오늘 분석할 논문, <소농들의 지속가능한 농업: 커먼즈(commons) 기반의 유기농 전환과 확장 사례 (한양대학교 글로벌사회혁신단 이미옥)>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희망적인 제안을 담고 있습니다.
기존의 개발 방식은 주로 국가(정부 주도) 또는 시장(사유재산 기반)의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오스트롬(Ostrom)은 제3의 길을 증명했습니다. 강제력을 행사하는 정부나 사유재산 기반의 시장을 벗어나, 수많은 공동체가 스스로 만든 규칙으로 공동자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해왔음을 보여주며 커먼즈(Commons) 기반 접근법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커먼즈란, 단순히 공동자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자원을 둘러싼 커뮤니티, 관리 제도, 그리고 함께 무언가를 해나가는 모든 사회적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특정 공동체가 '우리에게 중요한 자원'을 '우리 스스로 만든 규칙'에 따라 함께 관리하고 가꾸는 살아있는 '사회적 시스템'입니다.
이 논문은 인도의 께랄라 지역 PDS(Peermade Development Society) 농민들의 성장과정을 통해, 커먼즈가 어떻게 위기를 희망으로 바꾸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960년대, '녹색혁명'의 바람이 인도 께랄라 지역에도 불어왔습니다. 화학 비료와 농약, 개량된 단일 품종은 식량 증산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토양은 죽어갔고, 농민들은 비싼 투입재를 사느라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마을 단위로 지식과 노동력을 나누던 '전통적 커먼즈'가 해체되고 각자도생하는 고립된 개인만 남게 된 것입니다. 논문은 이를 '탈커먼즈화(De-commonization)'라 부릅니다. 이는 외부에서 주입된 '현대화'가 오히려 공동체의 자생력을 파괴해버린, 많은 개발도상국 농촌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절망 속에서 농민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들은 소규모 자조모임(Self-Help Group)을 만들어 유기농법을 함께 배우고 실천하며 작은 성공들을 쌓아갔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는 동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발적 움직임은 PDS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특히 유기농 인증을 위해 자체적인 내부 통제 시스템(ICS)을 만든 것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는 외부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서로를 교육하고 감독하며 규칙을 함께 지켜나가는 시스템입니다. 이를 통해 농민들은 수동적인 '수혜자'에서 시스템을 운영하는 '주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성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외부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2010년대에 이르러 공정무역 인증을 통해 해외 소비자들과 직접 연결된 것입니다. 이제 PDS 농민들은 단순한 향신료 생산자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가치를 실현하는 파트너'로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담긴 상품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여정은 우리에게 단순한 성공 사례를 넘어, 농촌개발의 나침반이 될 수 있는 4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합니다.
1. '자원 공급'을 넘어 '시스템 구축'으로 관점을 전환하라.
좋은 종묘와 비료를 나눠주는 것만으로는 자립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농민들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자원을 관리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커먼즈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국제개발협력 프로젝트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기보다, 자조그룹(SHGs)의 자발적 조직화와 참여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촉진하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업의 성공 지표는 '나눠준 묘목 수'가 아니라 '스스로 운영되는 회의 횟수'가 되어야 합니다.
2. 보이지 않는 자산, '사회적 자본'에 투자하라.
기술 교육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주민들 간의 신뢰를 쌓는 활동입니다. 공동 노동, 마을 축제, 소규모 저축 모임 등은 단기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사업의 가장 단단한 기반이 되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자본 위에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유기농, 혼농임업 등 기후 친화적 농법도 더 효과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3. 농민을 '수혜자'가 아닌 '혁신가'로 대우하라.
PDS의 '랜드투랩(Land-to-Lab)' 프로그램은 농민의 전통 지식과 경험을 존중하고, 이를 현대 기술과 결합하여 새로운 혁신을 이끌어냈습니다. "우리가 가르쳐준다"는 태도를 버리고, "농민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겸손한 자세로 현장의 지혜를 발견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4. '글로벌 커머닝'을 통해 지속가능한 연대를 구축하라.
우리의 역할은 한 마을의 자립을 넘어, 그들이 만든 가치있는 생산물이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세계 시장과 연결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판로 개척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공동의 가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연대의 과정을 설계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의 압력으로 커먼즈가 다시 해체될 위험은 항상 존재합니다. 초기 유기농 전환 시 발생하는 수확량 감소나 기술적 어려움도 큰 장벽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ODA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안정적인 버팀목이 되어 초기 금융, 교육, R&D를 지원함으로써 공동체가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스스로 설 힘을 기르도록 도와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성공적인 농촌개발이란 외부인이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 정답을 찾아갈 힘(커먼즈)을 길러주는 과정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현장의 동료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노력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도의 커먼스의 사례는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이 일방적인 커피 '묘목'이 아니라, 그 땅의 사람들이 함께 가꾸어갈 신뢰와 협력, 그리고 자부심이라는 '씨앗'임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업 현장에서 가장 먼저 심을 수 있는 '씨앗'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