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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라멜 Oct 12. 2022

난 가방끈이 짧다

20년차 직딩이 대학원으로 간 까닭은?

난 가방끈이 짧다

흔히 배움의 정도나 깊이를 얘기할 때 가방끈에 비유하곤 한다. 대학진학률이 높은 요즘은 대학만 졸업하는 학사는 짧은 가방끈에 속하기도 한다. 내 주변에는 석사는 기본이고 박사 학위를 가진 분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가방끈은 아주 짧은 축에 속한다.


학창시절은 노력 만큼 결과가 꾸준히 나타났다. TV 안보고 그 시간에 독서실에서 문제 풀이 하나라도 더 한 시험은 결과가 좋았다. 시험 성적은 정직했다. 시험 결과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공부한만큼 나온다. 그래도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럴 때는 두가지를 고민하게 된다. 첫번째는 내 공부량이 적었을 가능성. 두번째는 공부는 많이 했는데 목표와 대상을 잘못됐을 가능성. 대충 몇 번의 시험에 한번씩은 실패할 때가 있었지만, 긴 기간을 놓고 보면 연거푸 추락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주식 투자로 치면 그나마 점진적으로 우상향하는 그래프다. 


폭락장은 고3 때 왔다. 1학년과 2학년에는 없었던 슬럼프가 제대로 온 것이다. 책상에 앉아있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게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양도 부족했고 방법은 모두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빗나갔다. 막판 스퍼트로 속력을 내야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과부하가 걸린 나는 무기력에 빠졌다. 시험 성적은 미끄러졌고 그 결과는 대학입시 낙방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실 자기 자신은 본인이 제일 잘 안다. 요즘 잘 쓰는 말로 '메타인지'라는 어려운 용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쓸 필요가 없다. 고3 시기를 보내면서 재수는 필수라며 자위하고 1년 더 공부하게 될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리적 충격을 덜 받기 위해서라지만 막상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이 서울로 떠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니 충격은 꽤 컸다.


결정적인 계기...재수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에서 시작한 1년간의 재수 생활은 고3 방황의 연장선에 있었다. 다행인 것은 나와 똑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주변에 수백 명(정확히는 내가 다녔던 학원의 전체 정원이 4천 명에 육박했다)이었으니까 동병상련의 동료들이 가장 큰 위안이자 한편으로는 잠재적 경쟁자였다.


주식도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나면 다시 반등하기 마련이다. 공부도 그랬다. 큰 실패를 제대로 하고 시간이 흐르니 자연스럽게 다시 반등이 시작됐다. 공부 습관이 다시 생겼고, 이상하게도 1년 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입시 해법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과녁을 벗어나게 조준한 화살은 아무리 세게 당겨봐야 소용없다. 활시위를 당기기 전에 영점 조준을 위해 힘썼고, 그 다음에 차츰차츰 힘을 길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가 안되더라도 책상에서 참고서와 문제집을 잡고 씨름했다면 재수생활에서는 안되는 날은 과감히 포기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이문열의 에세이를 읽으며 마음을 다 잡았고 공부를 재끼는 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년의 재수 생활 끝에 다행히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반등을 시작한 주가는 꽤 오랫동안 상승장의 랠리를 이어갔다.


결정적 계기 2...IMF

재수로 대학에 들어가면 보통 2가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년 늦게 들어온 만큼 대충 1학년을 보내고 군대를 빨리 다녀와서 제대로 대학생활을 하려는 ‘착실한’ 부류. 다음은 나이가 1년 어린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이른바 ‘노땅’ 그룹에 합류하는 부류. 두번째의 경우 학점은 상대적으로 바닥을 깔고 피씨방과 당구장을 전전긍긍하며 늘어가는건 주량과 당구 실력 밖에 없게 되는데 의외로 많다. 그래도 다행인건 난 1학년을 보내고 군대를 일찍 갔다.


군대에서 이른바 IMF를 맞았다. 그때는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다. 군 내에서도 연일 회의가 계속됐고, 금 모으기에 준하는 나라 살리기 운동과 정신무장 교육이 많았다. 그나마 군대에 있어서 졸업과 취직이 늦어졌다는걸 위안으로 삼으며 30개월을 보내고 다시 복학했다. 나이를 한살이라도 더 먹으니 철이 더 들었는지 공부에 제법 요령이 생겼다. 학점 관리는 물론 내가 목표로 세웠던 입사 준비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 공부가 쉬웠다면 거짓말인데 제법 재미가 있었다. 


결정적 계기 3...조기졸업

남은 대학 생활은 장학금과 조기졸업으로 이어졌고 졸업 전에 입사 시험에 합격하는 운으로 계속 이어쟜다. 졸업 이후 이어졌던 입사 시험이 계속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비록 최종 합격까지는 못갔지만 서류와 필기, 실기, 면접으로 이어지는 복잡하고 긴 입사 시험에서 대부분 최종 단계까지는 갈 수 있었다. 중간에 몇몇 특이한 기업에 지원해 합격하기도 했지만, 최종 목표가 다른 곳에 있었던 만큼 합격 포기원을 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최종 면접에 오른 2개의 회사 가운데 시험 날짜가 상대적으로 몇일 빨랐던 곳에서 면접을 봤고, 다른 곳은 가지 않는 것으로 포기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졸업과 동시에 입사에 성공했고 월드컵으로 떠들썩했던 2002년은 나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이쯤되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방황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슬럼프도 있었지만 다행히 극복할 수 있었다. '하면 된다'는 상식적인 가치관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회사 생활을 오래하면서부터다. 회사는 조직이다. 몇 명 안되는 입사 동기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선배 집단과 해마다 늘어가는 후배들과 최소한 몇십 년은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잘 지내야 한다. 나의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시킨대로 열심히 일하면 최소한 나쁜 평가는 듣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의 인센티브가 주어질지 여부는 다음 문제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회사생활 10년이 지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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