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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라멜 Aug 06. 2024

자칫 상투적일 뻔했지만...

박경수 작가가 차린 밥상을 200% 소화해낸 설경구와 김희애

주인공 두 명이 너무 세면 일단 편하게 보기는 쉽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다. 같은 길을 가면 우정이나 사랑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길을 가면 갈등이 주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안성기와 박중훈의 호흡처럼 서로에게 시너지를 주기도 한다. 다만 둘다 히어로(hero)는 실패한다. 빌런이 필요한 이유다.


주변에서 “돌풍 봤어?” 얘기가 나올 때 보지 않았다. 설경구와 김희애는 너무 큰 산이기 때문이다. 넘사벽 연기를 보여주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지만 누구에게 악역을 맡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거기에다 대통령이 소재.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심 자극 신파가 아닐까 생각됐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첫 화면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본 콘텐츠로 클릭을 유혹할 때도 눌러보지 않았다. 하지만, 돌풍을 보게된 건 바로 이 전광판 때문이다.  

옥외광고에 진심인 넷플릭스 올림픽대로 광고

넷플릭스 카피라이터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 프로다. 올림픽대로를 통과하는 불과 몇 초의 시간에 운전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결국은 보게 만든다. 설명이 장황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다.

폭염이 계속되자 넷플릭스는 이런 카피를 냈다!

에어컨을 끄지 않고 높은 온도로 두는게 전기료가 가장 덜 나오는 건 이제는 널리 알려진 팩트다. 거기에 넷플릭스가 발을 슬쩍 담궜다. 그래서 결국 보게됐다.


돌풍은 남성적인 드라마이다. 박경수 작가는 권력을 다룬다. 권력 앞에서 인간은 본능을 드러낸다. 꾸밀 수가 없다. 한 배를 탔던 두 사람이 원했던 자리는 하나였다. 의자는 하나인데, 두 명이 앉을 수는 없다. 한 사람은 계승하고 싶어하지만, 한 사람은 극복하려고 한다. 보수와 진보. 하지만, 대학시절 그들은 반대였다.


과거를 극복하고, 현실을 넘어선, 두 사람이 그리는 미래는 달랐다. 복수는 필연이다. 복수는 치밀하게 준비되고, 성공과 실패는 두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렇게 12회 동안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끌고 간다.


주변의 반응은 셋으로 나눠졌다. 돌풍을 안 본 사람들과 돌풍을 다 본 사람들, 그리고 돌풍을 시작했다가 보지 않은 사람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첫째, 돌풍을 안 본 사람들은 넷플릭스 미가입자이거나 '돌풍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 분들은 넷플릭스가 아무리 많은 예산을 들여서 비슷한 콘텐츠를 만들더라도 좀처럼 볼 가능성이 낮다. OTT 시장의 파이(가입자 숫자)가 커지지 않고, 플랫폼을 옮겨다니는 제로섬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건 이를 반영한다. 기업 입장에선 이들을 가입시키고, 보게 만들어야 진정한 성장이다. 


둘째, 돌풍을 다 본 사람들은 요즘 가장 많은 부류의 시청자들이다. OTT 신작이 나오면 이를 기다렸다가 1회를 끈기있게 본다. 넷플릭스에선 1회의 벽이라는 말도 있다. 첫회를 다 본 사람들은 그만큼 계속 볼 가능성이 높은데 그 벽을 돌파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시리즈물을 염두에 두고 쓴 서사는 몰아보기(Binge watching)나 클리프행어(Cliffhanger) 이펙트로 설명된다. 끝나지 않은 결말을 참을 수 없는 심리를 이용한 건데, 이게 불편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본다. 몇 번은 참을 수 있지만, 계속되는 열린 결말을 다음 회가 공개될 때까지 참기는 쉽지 않다. 몰아보기는 OTT 시청의 대표 장르다.


셋째, 돌풍을 시작했다가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1회의 벽을 넘지 못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내용이 불편하거나 형식이 불편하다. 내용이 재미없었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충 이유는 비슷했다. 드라마 대사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주인공 캐릭터들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거다. 형식이 불편한 이유는 거의 5분 마다 반복되는 인위적인 반전이 피곤했단다.  


난 돌풍이 돌풍을 일으킨지 한참이 지나서야 광고판을 보고 늦게 시작했다. 그리곤 두번에 걸쳐 몰아본 부류에 속했다. 돌풍을 다 본 이유는 이렇다. 만나는 사람들이 일정하고, 하루에 말을 하는 장소와 시간이 정해진 직장인이라 쓰는 단어는 즐겨쓰는 단어는 2백 단어도 되지 않은 것 같은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 설경구, 김희애, 그리고 막강 조연들이 뿜어내는 대사들은 가뭄에 단비 같았다. 비록 그들의 대사가 나의 일상에 적용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난 누군가가 본론부터 얘기하면 이런 말도 하고 싶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네. 식사가 다 끝나기도 전에 디저트부터 내오는 걸 보니...


매번 같은 실수에 상사에게 꾸중을 듣거나, 우리 가족이 실망하거나, 힘들어하는 친구에겐 이런 말도 건네고 싶다.

 

사람이니까 살아온 대로 살아가겠지...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얽힌 역사 속에서 억울한 누명을 써던 사람들의 고충은 이 한마디로 이해된다.


누명은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만 무죄를 입증하는 건 천 마디 말로도 부족하다


굳이 정치인까지 갈 거 없다. 마음에 안드는 회사 선배에겐 이런 말을 속으로 하고 싶다.


당신이 만든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되니까...


반전의 반전을 이어가는 긴장감은 박경수의 '글발'과 설경구의 짧은 호흡 속에 반복되는 '분노'와 김희애의 '말발'에서 한번도 어색하지 않았다. 



2005년부터 발렌타인 마스터 블렌더를 하고 있는 샌디 히슬롭은 이런 얘기를 했다.


저는 지금 이렇게 마스터 블렌더로 성장하기까지

선대 마스터 블렌더 잭 가우디로부터

다양한 풍미를 기억하고 설명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위스키를 마실 때

나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을 담은 나만의 단어집을 만들어 보세요.

절대 다른 사람들이 쓰는 단어를 그대로 따라해선 안됩니다.

남들은 아직 알지 못하지만

나만이 아는 향미에 대한 경험을

구체적으로 끄집어 내길 바랍니다. 조선비즈 (2023. 4.24.)


맛은 '있다'와 '없다'로만 표현하기에는 세상의 맛은 너무도 많다. 재미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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