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럭이 들려주는 회사생활 이야기 (5) : 열정편
야구와 함께 한 나의 어린 시절
어릴 적 교외에 살았던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인적이 드문 동네다 보니 또래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 옆에 있는 산에 오르거나 마당에서 키우던 개, 고양이와 노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맡에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가 놓여 있었다. 특별한 날도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선물로 사 주신 것이다. 그 해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1982년 봄의 일이다.
나는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었다. 여러 포지션 중 특히 투수를 좋아했는데, 마운드에서 고독하게 상대팀 선수 모두를 상대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해태에는 선동렬이 있었다. 선동렬이 마운드에 오르면 상대팀은 금세 주눅이 들었고, 해태는 어김없이 승리를 챙겼다. 나는 야구 중계가 끝나면 글러브와 공을 들고 나와 선동렬이 던지는 모습을 상상하며 담벼락에 던져 댔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야구와 함께였다. 반 친구들과 모여도 야구만 했다. 덕분에 나의 어깨는 내 신체 중 가장 훌륭했다. 체력검사를 하면 다른 종목은 다 평균 이하였지만 멀리 던지기 만큼은 반에서 늘 1등이었다.
세월이 흘러 선동렬은 은퇴를 했다. 몇 년 후 이종범도 은퇴했다. 그렇게 나의 영웅들은 세월을 뒤로 했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더 이상 야구에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박찬호라는 선수가 선동렬도 해내지 못한 메이저리그 진출을 했다. 그때부터 메이저리그를 보기 시작했다. 한국사람이 전 세계에서 제일 야구 잘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에서 삼진을 펑펑 잡아내는 모습에 나는 열광했다. 케빈브라운 같은 당대 최고의 투수와 대등한 경기를 했고, 데릭지터, 노마 가르시아파라, 치퍼존스, 마크 맥과이어 등 숱한 강타자들과 맞서 싸웠다.
이어 등장한 김병현은 뱀직구를 앞세워 기적 같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커트실링의 핏빛 투혼은 내 심장을 쉴 새 없이 뛰게 했다. 랜디존슨과 커트실링... 그 이름만으로도 경외감이 들었다.
박찬호, 김병현이 메이저리그를 떠나자 다시 야구는 내 일상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류현진이 LA 다저스에 입단했다. 한국 최고의 투수가 다시 메이저리그 무대에 선 것이다. 가슴속에서 야구에 대한 열망이 재차 솟구쳤다. 류현진 경기를 보면서 점점 LA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LA 다저스의 경기를 하나 둘 챙겨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클레이튼 커쇼라는 선수를 알게 되었다.
커쇼는 과연 어떤 선수인가?
그는 다저스, 아니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다. 93.6마일(약 151km/h)의 포심 패스트볼과 80마일 후반의 슬라이더를 주로 던지며, 70마일 대의 커브를 결정구로 활용한다.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도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지만, 특히 커브는 화면으로 봐도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는 게 보일 정도의 마구다. 게다가 와인드업 후 한번 멈칫했다가 던지는 독특한 투구폼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뺐는데, 어떻게 그런 폼으로 계속 던질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만 28세의 커쇼는 투수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상인 사이영상을 이미 3차례나 수상했으며(2011년, 2013년, 2014년), 2014년에는 MVP까지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투수가 MVP를 수상한 것은 내셔널리그에서 46년 만이니,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커쇼가 부진하다고 했던 2015년에도 300 탈삼진을 돌파했으니, 이 또한 메이저리그 13년 만의 대기록이다.
출처 : LA 다저스 공식 페이스북
하지만 커쇼를 이야기할 때, 그가 쌓은 기록과 커리어를 언급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오히려 커쇼를 설명하기에 더 적합한 것은 바로 그의 성실함과 겸손, 그리고 열정에 대해서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커쇼는 앞으로 더 위대한 기록을 남기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커쇼는 물론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선수다. 하지만 괴물들이 넘쳐나는 메이저리그에서 커쇼만 한 재능을 가진 선수는 많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치를 계속 넘어서고 있는 선수다. 선수의 특징을 세밀하게 분석해 약점을 찾아내고, 이를 집요하게 공략하는 메이저리그라는 정글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 왔다.
지금의 커쇼는 제구력이 매우 뛰어난 투수로 정평이 나 있지만, 데뷔 초기인 2009년만 해도 9이닝당 볼넷이 4개를 넘을 정도로 제구력이 좋지 않았다. 커쇼는 원래 패스트볼과 커브만 던지던 2 피치 투수다. 그런데 커브의 낙차가 워낙 커 제구에 애를 먹다 보니 볼넷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구력을 높이기 위해 슬라이더를 추가로 집중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슬라이더를 마스터했고, 애를 먹이던 커브도 부단한 노력으로 안정감을 찾아갔다. 이렇게 제구력이 뛰어난 3 피치 투수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커쇼의 이 세 가지 구종(포심 패스트볼, 슬라이더, 커브)은 아주 고전적인 구질들이다. 커터, 싱커, 포크볼, 스플리터 등 다양하고 변칙적인 구종이 넘치며, 최소한 4가지 이상은 구사하는 게 기본인 현대 야구에서 가장 뻔한 구종 딱 3가지만 가지고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이유는 뭘까? 그건 바로, 이 구종들의 위력이 모두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투수는 대표 구종이 한 가지인 반면, 커쇼는 3가지가 모두 대표 구종인 셈이다.
하지만 커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자들이 자신을 공략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한다고 생각하자, 무기를 추가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것은 바로 체인지업이다. 과거 체인지업을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어 포기를 했었는데, 다시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쇼의 배움에는 자존심도 없다. 최고 투수가 이제 막 메이저에 데뷔한 신인 류현진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 달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올해, 커쇼의 체인지업이 슬슬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체인지업마저 마스터한다면 이미 인간계를 벗어난 커쇼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이다.
커쇼는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명문 사립고에 진학시킨 어머니를 하루빨리 부양하겠다는 일념 하에 운동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고교 성적 13승 무패, 방어율 0.77, 64이닝 139 탈삼진이라는 만화 같은 기록을 세운다.
특히, 5이닝 동안 15 타자 전원을 삼진으로 콜드게임 승을 따내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는 데, 이를 계기로 거액의 계약금(230만 달러)을 받고 LA 다저스에 입단하게 된다. 이쯤 되면 통상 고급 스포츠카를 뽑고 흥청망청 돈을 쓰는 선수가 많은데, 커쇼는 고작 미국의 국민차인 포드의 픽업트럭을 샀다고 한다. 이를 본 야구 관계자들은 커쇼가 대성할 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또한, 시합 전 가장 먼저 구장에 나와 연습을 시작하고, 경기가 끝난 후 가장 늦게까지 훈련을 하는 선수가 바로 커쇼다. 지금의 결과에 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한 자세로 임하기 때문에 진화를 거듭하는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014년 커쇼가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때 다시 한번 그의 인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7회까지 퍼펙트게임을 이어가던 중, 유격수 헨리 라미레스가 평범한 타구를 처리하지 못해 퍼펙트 게임이 무산됐다. 하지만, 커쇼는 헨리의 모자를 주워 주며 오히려 격려를 했고, 결국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헨리의 실책에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동료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대기록을 세울 수 없었을 거라고...
커쇼의 노히트 게임을 확인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Duc8__PoZTo
사실 나는 이 점을 가장 높게 사고 싶다. 커쇼는 메이저리그 선수 중 가장 승부욕이 강한 선수다. 홈런을 맞은 선수에게도 절대 피하는 법이 없다. 다음 타석에서 똑같이 정면승부를 한다.(이 때문에 포스트시즌 세인트루이스에게 처참하게 무너지기도 했지만, 언젠가 이 또한 극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커쇼이기 때문이다.)
타자가 친 타구가 날아오면 피하지 않고 몸을 날린다. 등판이 없을 때 덕아웃에 있는 커쇼는 잘 웃고, 동료들과 농담도 잘한다. 동료들의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제일 큰소리로 응원하는 응원단장이다. 하지만 등판이 있는 날에는 아침부터 초 집중을 한다. 투구 중간중간 덕아웃에서 쉴 때도 고개를 숙인 채 경기에 오롯이 몰입한다.
오랜 기간 야구를 하면서 이런 열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난 정말 존경스럽다.
이제 회사생활을 야구에 빗대 볼까?
커쇼의 세 가지 무기인 포심 패스트볼, 슬라이더, 커브는 뻔한 구종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세가지야 말로 투수의 기본 자질과도 같은 것이며, 커쇼는 그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언급한 커쇼의 성실함, 겸손, 열정은 회사원에게 아주 뻔한, 기본 자질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요즘 시대엔 창의성, 개성, 엉뚱함 등 다양한 요소가 각광을 받는다. 마치 야구의 커터, 싱커, 포크볼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실함, 겸손, 열정이라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요소가 받쳐진 상태에서 추가로 충족되어야 한다. 마치 커쇼가 추가로 체인지업을 연마하는 것처럼 말이다.
회사생활을 10년 이상 하다 보니 깨달은 게 있다. 창의성? 기발한 아이디어? 이런 것들은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 갑자기 나오는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성실하게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해야 나오는 결과물이다. 거기에 겸손함이 더해져야 그 결과물이 진정으로 인정받게 된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신입 때의 초심을 잃고 나태해질 때가 있다. 3년마다 매너리즘이 찾아온다는 3년 주기설이란 말이 있을 정도니, 나를 비롯해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말했다. 초심은 자주 새롭게 되풀이해서 감아줘야 할 태엽과 같은 것이라고...
매너리즘이 찾아오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태엽을 감아주자. 나는 커쇼의 경기를 보며 나의 태엽이 팽팽해질 때까지 힘차게 감아준다.
ps) 글의 주제와 무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커쇼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잠비아의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 수년째 봉사활동을 해 온 기부천사다. "희망의 집"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을 세웠으며, 탈삼진 1개당 500달러를 기부하고 있다.
그리고 "커쇼의 도전"이라는 자선단체를 직접 만들어 미국 내 빈민들을 돕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브랜치 리키 상 등 사회공헌으로 모범을 보인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을 다수 수상하기도 했다. 커쇼는 독실한 신자지만 기부와 봉사활동을 하며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크리스천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려 노력할 뿐이다” - 클레이튼 커쇼의 인터뷰 中 -
https://www.youtube.com/watch?v=tG5dbehOb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