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편집한다 [Looper]

놓지 못한 순간은 계속 재생된다

by 나이스땡 nicetteng

루퍼란 무엇인가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과거는 원본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렌더링된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그 놓지 못한 기억의 루프 속에 갇힌 루퍼입니다.

'루퍼(Looper)'는 시간의 굴레에 갇힌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음악과 영상에서 반복 재생 장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머릿속의 생각이 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맴도는 상태를 비꼬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그 단어가 저를 꽤 잘 설명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나는 같은 장면을 반복 재생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같은 장면을 반복 재생하는 사람

잘못 보낸 톡 하나, 어색했던 첫 만남, 사람들 앞에서 기대에 못 미쳤던 순간.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데, 유독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더 괴로운 건, 그 사람은 이미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남들은 지나간 장면인데, 나 혼자 그 순간을 수백 번 돌려보고 있는 거죠.

그 비대칭이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약간의 완벽주의와 강박이 있다. 그래서 같은 장면을 자꾸 반복한다. 마치 편집 프로그램에서 같은 클립을 계속 재생하듯, 그 순간의 말 한마디와 표정을 다시 꺼내 본다.

Ctrl+Z를 누르고 싶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편집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객관적인 기억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일어난 일들은 각자의 머릿속에서 다시 편집된다. 우리는 각자만의 편집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잘라내고 붙인다. 어떤 기억은 분노의 폴더에, 어떤 기억은 슬픔의 폴더에 저장된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다른 과거를 만들어간다.

문제는, 그 편집이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후회라는 이름으로 꺼냈다가, 다른 감정의 폴더로 옮기고, 지웠다가 다시 살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기억을 편집하는 건지 기억이 나를 편집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층이 쌓인다

실수한 내가 있고, 그 장면을 편집하는 내가 있고, 그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 내가 있다.
층이 하나씩 쌓인다. 위로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계단처럼.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내가 기억하는 것이 진짜인지조차 흐릿해진다.



초침은 다시 시작된다

잠깐 멈출 수는 있다.

지쳐서 덮어두고, 잊은 척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시 떠오른다. 초침이 다시 움직이듯, 그 장면도 다시 재생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되돌리지 못한다. 대신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Looper는 시간을 거꾸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놓지 못한 순간을 계속 재생하는 사람이다.

그건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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