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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쉐퍼드 Mar 01. 2018

토종 흙수저 영어랑 친구 되기 (1)

- 찰랑 찰랑 나의 영어 잔을 채우기

저는 16년 차 영어강사입니다.

지금은 영어로 밥 벌어먹고, 미국에서 영어교육학 석사로 유학도 했고

서로 마음을 나누며 울어줄 수 있는 진정한 원어민 친구도 사귀었고,

혼자 해외여행을 가라면 '아이고 말이 통하겠어' 이런 걱정 없이 훌쩍 떠날 수 있습니다.

저는 영어랑 친구입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친했던 것은 아닙니다. 무척 힘든 시기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제가 어떻게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었는지 솔직한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이 글은 영어가 아직 부담스러우신 분들 어떻게 공부할지 막막하신 분들

몇 번이고 공부를 맘 잡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실망, 좌절하신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영어를 처음 배우게 된 것은 지난번에 한번 쓰기도 했는데요. 그대로 한번 가져왔습니다.

제가 처음 영어라는 존재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이 표현이 좀 웃길지 모르지만 영어라는 언어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영어가 내 삶에 들어온 경험이라 해야 할까요. 어느 날 저와 나이가 같은 사촌이 제가 음료수를 마시는데 갑자기 이러는 겁니다. "에프, 에이, 엔, 티, 에이"  '잉? 뭐라고?'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당최 알아듣지 못하는 제게  사촌은 제가 마시고 있는 음료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말했죠. "에프, 에이, 엔, 티, 에이" 아시겠나요? 제가 당시에 무슨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는지?  " F.A.N.T.A " 네 맞습니다.  저는 환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고, 아마도 이제 막 알파벳을 알아가기 시작했던 사촌은 거기 쓰인 글자를 읽은 것 같습니다. 아는 글자들을 읽는 것이 무척 재밌을 때였겠지요. 물론 제 앞에서 약간 자부심도 생기고요. 저는 쟤가 아는 걸 내가 모른다는 큰 충격에 빠졌고, 그 겨울방학에 영어공부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A에이, B비, C 씨, D디 를 공책에 쓰면서  다 외우니 뭔 글자가 자매품도 아니도 또 있다고 하더군요. 왜 한 번에 안 가르쳐주나 하면서 열심히 썼지요 소문자 a에이, b비, c 씨, d디.. 무자게 헷갈렸습니다. 그러고 나자 나오는 I am a girl. 그동안의 실력을 발휘해 읽어봅니다. 아이 에이 엠 에이 쥐 아이 알엘.(이렇게 유창하게도 아니고 그 와중에 몇 개는 버벅거리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아이 엠 어 걸. 아이 엠 어 걸.' 선생님을 따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단어 시험을 본답니다. 집에서 단어를 외우죠. 손으로 쓰면서.. 가끔 입으로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쥐 아이 알엘, 쥐 아이 알엘, 걸, 걸.

 6학년이라는 나이에 알파벳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해 그 이후 중, 고등학교 때 전형적인 한국식 방법으로 영어를 배웠습니다. 독해-문제풀이-문법-시험 이 속에서 영어시험은 있었지만 진정한 영어 습득은 없는 시기였지요.


제가 영어공부를 제대로 시작한 것은 영어영문과 입학 이후부터입니다.

고3 때 원서를 쓰면서 국문과를 가고 싶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굶는과(죄송합니다. 제 의견이 아닙니다.)라면서 차라리 취업이 잘 되는 영문과를 가라고 하셨죠. 암튼 아무 생각도 꿈도 없었던 저는 그다지 잘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영문과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당시 정원이 40명인 학교에는 정원외 입학까지 해서 44명의 학생이 있었어요. 4명 아이들은 일명 특례입학이라고 외국에서 공부하다 온 아이들이었는데 딱 보면 굉장히 세련된 분위기 아이들인데 뭐라 뭐라 대화 중간에 막 영어도 하고 잘 모르겠는 말도(스페인어였던 것 같아요) 하고 그러더라고요. 또 특례 입학은 아니지만 강남 출신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아이들 중에는 전 뉴스에서 자료화면으로만 봤는데 실제로 미군부대로 셔틀을 타고 다니며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웠다는 친구들도 있고, 어릴 때 교환교수로 가신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서 살다온 경험이 있는 친구들도 있고 했어요. 까만 롱부츠에 미니스커트, 깔끔한 청바지에 외국 영화에 나오는 듯 세련된 백팩, 찰랑찰랑 긴 머리를 흩날리는 동기들에 비해 당시 저기 서울의 끝 쌍문동 **여고 출신으로 (응답하라 1988에도 등장하는 그 학교예요 브라질 떡볶이 가게 있는) 머리 노란 원어민 선생님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봤고 영어 발음은 친구들과 비교도 안되게 구수했고, 엄마가 대학 입학했다고 큰 맘먹고 사준 두꺼운데 약간 촌스러운 코트를 입었고, 추우면 늘 빨개지는 양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영어수업을 들으며 볼은 더 붉어진 채로 앉아있곤 했지요. 스무 살 어린 마음에 그런 제 모습이 친구들에 비해 약간 촌스럽다 떨어진다 평가하며 자존감이 좀 많이 낮아져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이 이야기를 좀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영어를 배울 때 우리 '마음'이라는 게 되게 중요하거든요. (학문적으로는 Affective Filter라고 이야기해요. 감정적으로 걸러내는 필터. 무슨 말이냐면 이 필터가 높으면 영어가 잘 통과해 들어가질 않는 거예요. 보통 어린이에 비해 성인들은 이 Affective Filter가 높아요) 저는 초반에 이 Affective Filter가 무지 높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학생 중에 이 필터가 높은 사람이 눈에 많이 밟히고 더 많이 챙겨주고 싶고 그래요. 암튼 이런 사람은 아주 긍정적이고 칭찬받는 환경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 부연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입학하자마다 학교에서는 토익시험을 보고 인원을 선발해 아주 저렴한 과정으로 하루 3시간 정도 원어민 수업 과정을 지원해주는 영어 몰입교육(Immersion Program) 대상 선발 시험이 있었어요. 일단 선택한 전공이니  잘해보자 응시를 했는데 완전 당당히 떨어진 거예요. 제 옆에 같이 봤던 그 강남 친구는 붙었는데, 심지어 영문과가 아닌 친구들도 턱턱 붙었는데 너무너무 부럽고 또 창피하더라고요. 그리고 언젠가 영미 단편 수업시간에 책의 구절을 일어나서 읽게 시켰어요.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요 Michael(마이클) 이란 이름이 나왔는데 갑자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다 미셀 하고 읽었는데 특례입학 친구들 그룹에서 풋~ 하는 웃음이 들리는 거예요. 거짓말 안 하고 한 일주일은 그 친구들 근처에도 못 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왜 이렇게 찌질했을까 싶어요. 토익이야 그런 시험을 한 번도 안 봤고, 시험에 대비해 공부도 안 해봤으니까 당연한 건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독해, 문법, 수능 공부만 했는데 어떻게 영어가 들리겠어요. 또 웃은 것도 그래요 저 때문에 웃은 게 아닐 수도 있고 웃었다 해도 넘어갈 수 있잖아요. 근데 저는 그때 너무 많이 주눅이 들었던 거예요. 너무 자존감이 바닥으로 갔었고요. 영어를 못하는 제 자신이 못나 보이고 하찮아 보이고 거기에 나는 외국도 한번 못 나가봤잖아. 우리 집은 가난하잖아.. 그런 못난 마음, 몹쓸 마음까지 추가되었으니까요. 제가 토종 흙수저라고 했잖아요. 맞아요 저 이때 돈도 없고, 스펙도 없는 흙수저였어요. 하지만 스스로를 낮게 만드는 이 열등감에 꽉 찬 제 연약한 마음이 사실은 더 심각한 흙수저였어요. 오페라의 유령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여자 주인공 크리스틴이 팬텀에게 "정말 추한 것은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에요"라고. 이때 저 스스로에게 "정말 심각한 것은 낮은 영어실력이 아니라 낮은 자존감이야"라고 바꾸어 말해주고 싶어요.  나중에 공부를 하면서 영어를 배울 때 각자 Language Ego (언어 자아)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이 언어 자아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힘들어지면 나타나 방어기제가 되어 새 언어 배우는 것을 방해한다고 해요. 저의 이 초창기 열등감의 시기는 확실히 방어기제가 발생하면서 제가 영어를 못할 수밖에 없는 핑계를 대고 하기 싫어하고 했어요. 우리 주위에는 영어를 가르쳐준답시고 도리어 우리의 영어 자아를 뭉게 버리는 일들이 많이 벌어져요. 학생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공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영어 좀 잘한다고 못하는 학생 무시하는 발언하는 분(심지어 본인은 고생하나도 안 하고 배운 원어민이면서 ) 실력 향상을 구실로 학생들에게 막대하면서 무시하고 그러는 거 저는 좀 안타까워요. 그리고 학생들의 Language Ego는 어쩔 거냐 묻고 싶어요. 암튼 이 시기 영어를 못하는 영문과 학생으로 그 당시 제 영어 자아는 마이너스, 네거티브 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전공이 영어인지라 피할 순 없었어요. 그리고 1학년 때 전 운명적인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요. 당시 미국에서 Testing을 전공하고 오신 지도교수님이신데 한국에서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잘 하셔서 학부를 공대를 가셨다가 전공을 바꿔 유학을 다녀오신 후 영문과 교수님이 되신 거예요.

담당하신 영어회화 수업에는 교수님이 직접 제작한 교재를 사용했어요. 매 챕터마다 유용한 실용영어 표현들이 있었고, 듣고 받아쓰기 (dictation)를 하는 항목이 있었고, 시트콤 중의 한 장면을 배워보는 항목도 있었어요. (제가 보물처럼 갖고 있었는데 최근 이사하며 버린 건지 찾을 수가 없네요. ㅜㅜ )

학기 초, 교수님이 처음으로 말씀해주신 건 잇풋, 아웃풋이었어요. 많이 듣고 그다음에 쓰고 말하고 하는 거라고, 인풋을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제게는 희망적인 이야기였어요. 제가 영어를 못하는 게 제 잘못인 거 같아서 많이 주눅 들어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단지 제 컵이 가득 차지 않아서 그런 거라잖아요. 당시 어학연수가 유행이 되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 이 인풋을 채우지 않고 가는 어학연수는 일 년 시간만 버리고 오는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저는 우리 집 돈 없어서 어학연수 못 가는데 억울해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어를 잘 배우는 것은 한국에서 공부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인도 그렇게 하셨다고요. 위의 말한 실용영어 표현, 듣고 받아쓰기, 시트콤 등은 요즘에도 영어교육에서 많이 쓰이는 거예요.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쓰인다는 이유는 아마 이 방법이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울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어서일까 싶네요.  이런 내용들이 이게 지금은 많이들 아시는 이야기지만 90년대에는 정말 쇼킹쇼킹이었죠. 당시 비싼 원어민 회화수업, 어학연수는 정말 진리처럼 필수 요소였거든요. ( 물론 그러다 IMF 이후 주춤...) 암튼 저는 운 좋게도 처음에 가이드라인을 잘 받은 셈이었죠.


제 맘은 편해졌지만 사실 강의는 굉장히 피곤했어요. 처음 수업을 들어가면 백지(A4도 아니고 B4)를 한 장씩 주시며 오늘의 챕터에 나오는 실용영어 표현을 외운 대로 쭉 쓰게 하셨죠. 생각을 해보세요. 몇십 명 학생들이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면서 외운 표현을 쓰는데 나만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티 나겠어요. 아무리 노는 게 좋은 대학 1학년 (그땐 미팅이 과로 주 3-4회 들어올 때라)이지만 예의상 외워줘야죠. 본문을 다 외울 생각은 아니고 딱 창피하지 않을 정도만 외웠어요. 그리고 듣고 받아쓰기하는 부분은 집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받아쓰기를 하는 거였어요. 주로 연음 부분을 많이 설명했는데 내용 자체가 미국 문화에 대한 게 많아서 콘텐츠도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미국은 라스트 네임이 패밀리 네임이고 뒤에 온다 뭐 이런 내용..), 또 시트콤은 "Family Ties"라는 거였는데 당시도 교수님은 문란한 성(당시 한국과 비교해서)이나 저속한 표현 등등 많다고 싫어하셨긴 했는데 그래도 살아있는 언어를 배우는 좋은 기회라 게 중에 엄선해 넣으신 것 같네요. 사실 첫 학기부터 열심히 하진 않았어요. 재수를 해볼까 싶기도 하고, 이래저래 미팅하고 축제하고 놀 일도 많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여름방학이더라고요. 그래도 한 학기 지내 본 결과 영어가 아주 싫진 않았어요.  

방학 때 뭘 해볼까 고민하다가 저는 1학기 영어회화 진도 부분을 노트를 하나 사서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표현을 다시 외우고 학기 중에는 숙제로 밑줄 부분만 딕테이션을 했는데 방학 때는 아예 통째로 첨부터 딕테이션을 했어요. 이미 수박겉핡기로 한 번은 공부한 거라서 잘 안 들리긴 안 들렸지만 아예 엄두를 못 낼 정도도 아니었어요.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들으니 조금 귀가 뚫리더라고요. 제 영어 컵이 채워지기 시작하는 거였죠. 그리고 시트콤 표현을 외웠어요. 지금도 맴도는 문장도 있네요 "I hate the thought of my father being all alone on his birthday coped up with~~"   어쨌든 학기초에는 뭔 소린지 당최 안 들리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들리는 것 같았지요.

"저는 이렇게 1학년 여름 방학을 온통 영어에 빠져 보냈어요"라고 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떤 날은 이렇게 보내고, 어떤 날은 정말 놀았지요. 중간중간 여행도 다니고 알바도 하고 적당히 영어 공부했어요. 딱 고만 큼만요. 왜 적당히 했을까를 돌아보면 제가 좀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고요. 또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공부에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영어공부가 방학 때 그냥 시간 남으니까 하는 거지 뭐 특별한 목표는 없었거든요. 다음 학기에는 성적도 좀 잘 받아야 할 것 같고 (1학기에 영어회화 같은 영어실력이 필요한 수업은 거의 B를 받았어요. ) 영어를 잘 하고도 싶고 했지만 그건 좀 막연한 목표였으니까요.


영어 공부에서 목표를 세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 정확한 목적지를 정하고 네비를 찍고 계속 가는 거랑 그냥 기분 전환 삼아 운전하는 거랑 다르잖아요. 목표가 없는 영어공부는 드라이브 나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영어공부를 효율적으로 하시려면 왜 하는지 반드시 본인에게 물어보시고 답변도 만들어놓으셔야(?)해요. 제가 실패해 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렇게 저의 영문과 일 학년은 아예 영어가 싫어서 담을 쌓지도 그렇다고 그 바다에 푹 빠져있지도 않은 채 마치 물에 발만 살짝 담근 듯 그렇게 지나고 있었습니다. (적. 당. 히가 포인트입니다. 죽을 만큼 안 하고 적당히만 했어요. 살살 마실 나오듯 필 받으면 확 하고 아님 접고 간헐적 영어공부를 하는 시기였습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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