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덕에 밥 벌어 먹기 영어랑 늙어 가기
4학년이 되고 저는 취재작가로 MBC 교양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어떻게 보면 180도 진로를 바꾼 것 같지만,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긴 했어요. 밀레니엄을 코 앞에 두고 있던 1999년, 처음 시작한 일은 <세계 속의 한국 여성>이라는 신년특집 다큐였어요. 세계 속에서 성공한 한국 여성들을 찾는 3부작 다큐였는데 저는 취재작가로 촬영할 인물에게 전화를 해 섭외를 하고 일정을 조정하고 또 피디와 메인작가에게 중간중간 보고하고 촬영을 다녀오면 테이프를 다 보면서 시간대별로 무슨 내용이 있는지 다 써놓고 프리뷰가 담당이었죠. 그때는 뭐 지금처럼 SNS나 인터넷이 발달했나요. 그저 신문기사 찾아서 취재한 기자에게 연락처 물어보고 외국에는 영사관이나 교민사회에 연락해 부탁해보고 인터넷을 뒤지고 전화통을 붙잡고 있어야 했죠. 당시 방송국에는 저 같은 작가 지망생 처자들이 많이 있었어요. 저마다 한 글발, 한 감각한다고 모였을 텐데 다들 매일 전화통 잡고 프리뷰하고 밤새기를 밥 먹듯 하고 치열 그 자체였어요. 모두가 꿈꾸는 것은 언젠가 내가 쓴 대본이 방송에 나온다는 것, 정말 작가가 되는 것이었죠.
뜻밖에도 저는 굉장히 일찍 꿈을 이루게 되었어요. 바로 영어 덕분이었죠. 저는 ABC 방송국 웹사이트를 통해 우리가 섭외할 주인공에게 이메일을 쓰고, 전화번호를 알아내 마침내 직접 통화도 해서 섭외에 성공했어요. 통역하는 사람을 부르고 부탁을 하고 할 필요 없이 일이 처리되니 훨씬 효율적이고 무엇보다 주인공과 직접 소통을 통해 가까워질 수 있어서 많은 내용을 방송에 담아낼 수 있었어요. 당시 같이 일하던 PD는 "영어로 섭외하는 작가", "순수 국내파로 영어 실력자다" 등 제가 민망할 정도로 좋은 소문을 많이 내주셨어요. 참 감사할 따름이죠. MBC에서 일 시작하고 6개월도 안돼서 아침방송의 작은 꼭지를 직접 집필하는 작가가 되었고, 월급은 40만원 수직상승(?)했어요. 저는 이렇게 된 것이 제가 대학시절 갈고닦은 영어 덕분이라고 믿어요. 물론 여러 감사한 분들과 상황이 있었고 제가 잘나서 그렇게 된 건 아니지만,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이 한 몫 한 것은 확실해요.벌써 20년이 된 이야기고, '요즘은 다 영어 잘해' 할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영어를 잘 말하고 쓰는 사람은 적은 것이 현실이에요. 제가 대학에서 가르칠 때도 첨엔 '요즘 대학생들은 다 영어를 잘하겠지'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한국은 영어가 일상생활에서는 쓰이지 않는 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국가예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은 돈을 들이고 영어교육을 받지만 영어를 편하게 쓰는 분들이 많지 않은 이유죠. 그래서 만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영어를 추가로 편하게만 할 수 있다면(완벽하게 아니더라도), 제가 방송작가라는 직업에서 영어를 잘 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확실한 경쟁력이 될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가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어요. 대학교 때 원어민처럼 영어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저는 나름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어요.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영어도 한국어도 줄줄 잘 하는 아이로 키워야겠다.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들게 영어 공부하지만 내 아이는 편하고 자연스럽게 영어를 잘 했으면 좋겠다' . 임신했을 때 꼭 태교를 위해서 한 건 아니지만, 제가 아이가 태어나면 불러주고 싶은 자장가도 미리 연습했어요. 왜냐하면 아이에게 영어로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은데 제가 영어공부를 했어도 여태 자장가를 영어로 불러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때 외운 자장가 중에 'The sooner you sleep, the sooner you will wake~'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거든요. 믿거나 말거나 아이가 태어나 안 자고 막 울 때( 큰 애는 밤낮이 바뀌어서 고생 많이 했어요) 이 노래를 불러주면 울음을 그치고 조용히~ 듣곤 했어요. 과학적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아 태교가 이런 건가' 하며 엄마와 아이의 신비스러운 교감을 경험했어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자연스레 영어를 접하게 해주기 위해 영어로 책을 읽고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엄마가 섬그늘에~'하는 노래와 'Hush little baby don't say a word~' 하는 자장가를 같이, '반짝반짝 작은 별~'도 불러주지만 어느 날은 'Twinkle, twinkle little stars~'도 불러주고요. EBS 뽀로로를 보여주면서, Wee sing, Barney처럼 영미권 어린이들이 보는 비디오도 같이 틀어주고요. 이런 것들은 제가 어릴 때 경험해보거나 영어 공부를 하면서 접해본 게 아니기 때문에 저도 다시 자료를 찾고 음원을 듣고 공부 하고 외우고 했죠. 권수를 정확히 세면서 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 책 영어책을 골고루 읽어주고요. 하루 시간을 정해놓고 이 시간은 꼭 영어 이런 것도 아니었어요. 어떤 날은 한 며칠 안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아이가 필 받으면 옆에 잔뜩 쌓아놓고 읽을 때도 있고요. 제 아이는 저 따라서 물론 미국에 유학도 다녀왔지만, 이미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현지 아이들보다 더 높은 레벨의 책을 읽었어요. 외국인이면 당연히 듣게 되는 ESL 클래스도 통과했고, 미국 도착하고 한 달도 안돼서 영어 잠꼬대를 하더라고요. 이미 그 아이의 영어의 컵은 열 살 이전에 제법 채워진 것이죠. 그래도 어려움은 있었죠. 문화적인 차이도 있고요. 저는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엄마들이 마음이 힘들어지실까 봐 조심스럽긴 해요. (요즘엔 아빠가 주 양육자 인경우도 많으니 아빠 포함!) 근데 저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아이를 낳고 신세계를 많이 배워야 하잖아요. 육아용품, 기저귀 채우는 법, 뽀로로, 삐뽀삐뽀 119, 어린이 동화책.. 저는 이 목록들에 영어책과 노래를 살포시 끼워놓고 싶어요. 소위 말하는 '엄마표 영어'를 무조건 해야 한다는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아이를 키우며 쭉 성장해보니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하는 방식이 너무 많은데 '영어'하면 이미 너무 높고 멀게 느껴져 겁을 내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제가 대학에서, 영어 도서관에서, 유아 TESOL 강의와, 왕초보 엄마 영어랑 친구 되기 란 이름으로'영어를 1도 모르는 엄마도 선생님도 아이와 즐길 수 있는 영어법'을 강의하면서 제가 전달해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거였어요. 다행히 수업을 들으시는 어머님들이 많이 공감하시고 '영어를 아직 잘 못하긴 하지만 할 만하고 해보고 싶은 것'이라 말씀하시면 이게 바로 제대로 된 시작 지점에 서신 거라 말씀드려요. 늘 말씀드려요. 저도 영어 어렵고 무서웠다고. 영어 때문에 속상하고 영어 때문에 자존감 낮아지고 했다고요. 하지만 그 과정을 버티고 나아가니 유학도 다녀오게 되고, 영어로 직업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제가 살면서 영어를 엄청 잘 써먹는 다는 거죠. 꼭 돈을 버는 일뿐 아니라 페북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여행을 가도 많은 대화를 나누고 경험하고, 또 힘들 때 위로받기 위해 듣는 영어노래나 읽는 영어책이 있고. 저는 이게 영어랑 친구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영어 덕분에 내 삶이 더 신나고 풍요로워질 거예요.
영어강사로서 앞으로 제가 남은 인생 동안 계속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이것이에요. 0세부터 100세까지 영어를 배우기에 빠른 나이도 늦은 나이도 없어요. 여태 못한 것을 후회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 이걸 해서 뭐하지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현재 상태에서 내가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하는 것을 꾸준히 오래 즐기다보면 반드시 영어가 전보다 편해지고 잘 쓰게되는 때가 와요.
이상으로 아주아주 긴 제가 영어랑 친구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여러분 만의 '영어랑 친구 되기'를 잘 만들어가시길 바래요.
지금 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