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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쉐퍼드 Mar 02. 2018

토종 흙수저 영어랑 친구 되기(3)

-나를 버리고 너를 채우다 (혹은 미쳐야 미친다)

계속해서 제가 영어 공부를 한 과정들을 이야기해드립니다.

구체적인 방법들보다는 흐름 위주로 이야기가 되네요. (너무 오래전이라 그런가..)

1편에서는 상대적으로 영어를 잘 못했던 영문과 학생으로 초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은 무엇인지와 더불어 다양한 자극들을 통해 제 영어 컵을 채워나간 방법을 말씀드렸고요. 2편에서는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채워진 인풋 안에서 원어민 수업과 해외연수를 했던 이야기를 말씀드렸어요. 무리한 원어민 수업과 연수가 답은 아니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나는 기회를 잡으라는 것이었어요. 오늘 시작할 3편은 제가 대학생활을 통틀어 가장 영어 때문에 괴로웠고 고민했고 그러면서 즐거웠던 성취감을 맛 본 경험을 말씀드리려고 해요.


3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에,  2년에 한 번 열리는 영어연극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극은 미국의 유명한 극작가 Thornton Wilder가 쓴 <The Matchmaker; 중매쟁이>였습니다.  Horace Vandergelder라는 늙고 돈은 많지만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스쿠르지 같은 영감이 결혼을 하고 싶어서 중매쟁이를 통해 여러 젊고 예쁜 아가씨들을 만나는데, 이 늙은이를 내심 마음에 두고 있던 중매쟁이 (Levi)의 빅픽쳐에 놀아나 나중에는 중매쟁이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죠. 아주 경쾌하고 마치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스토리였죠.(실제로 "Hello Dolly!"라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져서 1964년에 뮤지컬상을 휩쓸었다고 하네요) 사실 1학년 때 옆에 있던 친구의 끌어들임으로 제가 연극제에 합류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10분 내외의 간단한 콩트 같은 연극이었어요. 게다가 일 학년이다 보니 아주 작은 역할 (대사 한마디 하고 정신과 의사한테 주사?를 잘 못 맞고 내내 무대에서 기절해있다가 마지막에 일어나서 한마디 하고 나가는)을 했었고, 그다지 오랜 기간 연습을 하지도 않았었지요. 암튼 다시 또 연극을 하는데 한번 참가했던 저는 자동으로 명단 위에 올라가게 되었죠. 1시간도 넘는 정극을 어떻게 할까 연습 시간을 어떻게 빼야 할까 걱정도 되었지만 저의 동기 중에 영어 꽤 하는 친구들이 대거 합류했고 (1편에서 말씀드린 저를 단기적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한 그 친구들), 호주에서 온 원어민 연출자도 있어서 제대로 멋진 연극이 될 것 같아 참가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대본을 처음 보고 역할을 정하는 날 제가 참가를 못했어요. 근데 이후에 갑자기 통보가 온 거죠. 제가 주인공 남자 역에 발탁이 되었다는 거예요. (여대였습니다. 남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아니 이거 학교의 명예가 있지. 영어 잘하고 원어민 발음인 애들 놔두고 왜 내가 주인공?', ' 이쁜 옷 입고 화장하는 건 지들이 하고 이런 세상 못된 영감탱이 역을 나한테 맡겨?' 암튼 불만도 내심 있었지만, 이미 정해진 일을 좀 받아들이자 싶기도 하고, 싫은 걸 내놓고 말을 잘 못하는 답답한 성격이기도 해서 '대사량이 장난 아닐 텐데 어떻게 외우지?' 하며 순응하게 되었죠.

이제와 연극 공연의 과정을 돌아보면 세 단계로 나뉜 것 같습니다.


1. 대본 리딩 + 외우기 : 공연 석 달 전부터

 일단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고 읽어보고 다 함께 모여 읽으며 원어민 선생님의 교정을 받습니다. 이상하게 발음이 안 되는 단어가 있어요. 영어는 그냥 눈으로 읽을 줄만 아는 것과 이걸 소리 내서 발음할 줄 아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예요. 그리고 대부분 한국인은 남 앞에서 큰 소리로 영어로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하지만 친구들이고 연극 공연을 해야 한다는 큰 목적이 있다 보니 계속하게 되고 점점 편안하게 느끼게 되었어요. 대본을 외우는 동안에는 일단 많이 읽었어요. 틈나는 대로 버스 안에서도 아니면 공강 시간 잠깐 시간 날 때 마요. 그냥 단순히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암기하는 활동은 그것이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각인이 되는 효과가 있어요. 그리고 장기기억으로 저장시켜서 오래오래 우리가 두고 쓸 수 있게 해주는 거죠.  


2. 동작 넣어해보기: 공연 두 달 전부터  

어느 정도 각자 대본을 외우고 나서는 일어나서 실제로 무대에서 처럼 하듯이 동작 (연극에서는 Blocking이라고 하더라고요)을 곁들여서 연습을 하는데, 앉아서 읽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동작을 하고 상대와 합을 맞추게 되니까 진짜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거죠. 영어에서 몸을 이용해 학습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학습법이에요. TPR(Total Physical Resopose)라고 해서 어린이들 가르칠 때 "sit"하면 앉고 "stand up"하면 일어나면서 몸으로 영어를 익히게 하는 방법이에요. 대표적으로 영어유치원의 체육 시간 (P.E: Physical Response) 같은 경우가 그래요.


3. 동작과 대사가 하나가 되어 완전히 캐릭터에 몰입하기: 공연 한 달 전부터

공연이 다가올수록 연습의 강도는 높아지고 각자의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세트가 설치될 공연장에서 연습을 해보는 날이 많아지고, 저는 아버지의 오래된 양복바지를 무대의상으로 정해서 입고 다니며 제 몸에 익숙하도록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제가 짝사랑하는 젊은 여인 역을 맡은 친구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제 하인 역을 맡은 두 친구는 점점 장난스럽고 귀여워지고, 아주머니 역할을 맡은 친구는 악센트도 점점 영국식으로 우아해지면서 모두들 다 네가 이 역할에 딱이었어!! 가 된 거예요. 저 역시 넓은 이마, 큰 목소리, "idiot" 하고 외칠 때 괴팍스러운 표정 하며 점점 첨엔 제가 싫어하던 그 늙은 주인공에게 동화가 되고 있었답니다. 처음에 캐스팅이 완벽했다기보다 계속 연습을 하면서 저를 포함해 출연자들이 각자 자신의 모습을 잠깐 내려놓고 각자 역할에 푹 빠져버렸던 거예요  분장을 해주러 오셨던 분이 제 역할이 참 매력적이라는 말에 고럼 고럼 속으로 생각하기도 하고요. 영어 교실에서도 롤플레이(상황극) 같은 걸 많이 합니다. 자신의 자아가 아닌 또 다른 역할로 영어를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연구도 있어요. 우리가 영어회화 시간에 영어로 이름을 만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예요. 한글로 "김은희"는 한국어를 하는 사람인데 "Eunice"일 때는 조금 더 영어를 자유롭게 쓰는 사람이 되는 거죠.  연극은 성황리에 끝났고 한동안 그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20대 열정 가득했던 시절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제가 16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며 느낀 건 영어를 어떻게 잘 하게 되느냐. 그건 왕도가 없다예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이 있어요. 이 사람에게 맞는 방법은 따로 있는데 오히려 좋다고 따라 하면 별로인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요 "미쳐야 미친다!" 이 말은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말이 더 좋아 그것만 쓸 거야" 하고 은연중 나를 막고 있는 나의 모국어를 한 번 내려놓고 그분이 오셔서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꿈꾸고 잠꼬대하고 영어를 중얼거리며 영어로 한번 또 다른 자아를 획득하는 거예요. 이게 연극 공연을 해보는 걸 수도, 영화를 보며 대사를 다 외워버리는 것일 수도, 좋아하는 팝송, 시트콤 뭐 어떤 콘텐츠도 좋아요. 중요한 건 콘텐츠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 흠뻑 빠졌다는 거죠. 그리고 외우는 것! 이것은 많은 영어를 잘 하게 된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인데 또 많은 사람들에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기도 해요. (제가 전에도 말했잖아요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꼭 목표가 있어야 해요)


요즘 영어뮤지컬, 연극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우선 이럴 때 아이들은 영어를 다 외워요. 아주 쉽게요. 그리고 나름의 힘듬을 견디고 공연하는 날에는 분명 대단한 성취감을 느끼죠. 그리고 그런 자신을 기특해하며 조금 더 영어와 친해지는 계기가 되겠지요. 학원이나 학교에서 너무 보여주기 식으로 준비하지 않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부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는 부분들만 빼면 아주 좋은 효과들이 더 많아요. (근데 이럴 경우 학부모님들이 보시기에 좀 시시해지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저는 너무 초등학생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고등학교 때에도 이런 경험들이 좀 있었으면 해요. 아무래도 초등 때보다는 더 성숙한 경험이 될 거예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연극 공연을 지도해서 유치원, 초등학교, 캠프 등에서 공연에 올릴 때마다 이때 기억이 떠올랐어요. 제가 평생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학생들도 그러하길 바라면서요. 그래서 언제나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질 때마다 제 맘에도 반짝 불이 들어온답니다~


(사진을 정리하며 깨달은 사실! 연극을 같이 한 멤버 중에 동시통역사가 되어 싱가포르 거주하는 친구,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미국 거주하며 현지 회사 다니는 친구, 유명 영어유치원 선생님, 오마나 다들 열심히 살았네요. 이건 혹시나 이런 연극의 경험을 통해 뭔가 자신감과 성취감이 생기면서 스스로를 계속 발전시키려는 방향으로 간 건 아닐까.. 하면 너무 갔나요? 뭐 딴 친구들은 잘 몰라도 애 셋 낳고 워킹맘 하면서 석사 유학하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어 하는 저의 이 힘의 원천이, 그냥 나를 한번 내려놓고 철저히 새로운 상황에 미쳐(Crazy) 뭔가 버티고 하다 보면 미치는(Reach) 것을 몸소 체험한 이 연극의 경험도 한 몫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음엔 방송작가가 되어 영어 잘 하는 것 제대로 써먹은 일과 아이를 낳으며 제 영어의 이유가 또 한번 바뀐 것을 써볼께요.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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