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여고를 다녔던 나는 친구들을 보며 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꼭 두 명씩 붙어 다니는 친구들,
그중 한 명이야 생리적 현상의 부름을 받은 것이겠지만 다른 한 명마저 그 부름을 동시에 받은 것일까?
친하니까 생리현상의 사이클도 같을 수 있다고?
설마...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에서 본 그들은 한 명은 거울을 보며 또 다른 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던 친구가 나오자 다른 친구는 팔짱을 끼고 화장실을 나갔다.
흔한 일이라서 차마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수가 '정상'이 되고 소수가 '이상함'이 되는 것이 현실이니까.
오히려 그런 광경을 이상하게 보는 '내가 이상한가?' 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내 친구도 내 자리로 와서
"아무도야 화장실 안 갈래?"라고 묻곤 했다.
같이 가려면 갈 수 있었지만 난 굳이,
"응, 아까 갔다 왔어."라고 거리를 두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그랬는지 우습기도 하지만, 하여튼 난 '이상한'쪽을 택했다.
40대를 지나면서 나의 '거리두기' 성향은 더 짙어졌다.
친한 친구가 둘이 만나자고 하면 이리저리 돌려 다른 친구를 합류시켰다.
최소한 셋 이상은 되어야 마음이 편했다.
'너만 알고 있어.' 이런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고
'너한테만 하는 이야기인데'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알고 싶지 않은데,.."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지나친 친밀감을 거부하는 성향은 결혼생활에도 이어졌다.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 휴대전화 화면을 보는 남편에겐 곧잘 짜증을 냈다.
개인의 사생활은 각자 보존하자는 주의다.
불면증이 있는 나는 라벤다, 캐모마일 차 등이 불면증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브티를 즐겨마시곤 한다.
자기 전에 진하게 우린 캐모마일 한잔은 확실히 숙면에 도움이 됐다.
어느 날 허브를 키우면서 그 잎을 우려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시장에서 캐모마일은 구할 수 없었고 라벤다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한아름 안고 온 라벤다를 발코니에 놓고 호시탐탐 '잡아마실'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즈음 식물 키우기에 숙련된 때라. 물도 겉흙을 만져보고 가늠해 봐 가며 줬다.
햇볕도 적당했다.
그런데 비실비실 말라가더니 급기야 시골 폐가에 핀 거미줄처럼 죽어버렸다.
그 죽은 모습이 너무 비극적이라 그 이후에 허브류는 일체 사지 않았다.
한참 지난 뒤, 친구 집들이에 초대받아 갔다.
워낙 살림을 잘하는 친구라 집안 곳곳을 둘러볼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화장실 수건의 보송한 촉감, 부엌 천장 벽에 설치된 오픈 수납공간, 그곳에 빼곡한 각종 양념들, 차들을 보고 감탄했다. 마사 스튜어트가 봐도 사진을 찍어둘 것 같았다.
눈길이 마지막에 닿은 곳은 발코니. 발코니 가득 각종 허브가 향기롭게 자라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잘 키웠어? 내 라벤다는 다 죽었었는데. 그것도 너무 처참한 모습으로"
" 아무도 너. 라벤다 키울 때, 발코니 창문 안 열어놓은 거 아냐?"
"?"
"지난번 네 집 갔을 때도 닫혀 있던데?"
"그게 왜?"
"허브는 환기가 제일 중요해. 환기시키면서 바람을 맞아줘야 얘들은 잘 살아"
"오마낫... 물도 아니고 햇볕도 아니고 바람? 바람도 식물 키우기의 요소였단 말이야?"
그러고 보면 난 거실 쪽 창문보다는 부엌 쪽 창문을 더 자주 열고 환기시킨다. 부엌 쪽 창문은 아파트 정원이 있는 쪽이라 열면 공기가 좋아지는 반면, 거실 쪽 창문을 열면 도로 위 차에서 올라오는 공해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거였구나.... 바람... 바람을 맞고 싶었구나. 결국 라벤다가 병사가 아닌 질식사로 떠났단 말인가?"
우리 집에 속해있지만 바깥바람과도 놀고 싶었던 거구나.
내 집에 들어온 '내 식물'이라고 창문을 닫아놓고
"넌 우리 집 공기만 마셔"라고 한 내 행동은 지극히 이기적이었다.
라벤다는 우리 집 공기 이외에도 바깥공기도 마시고 싶고 바깥바람에 산들산들 춤도 추고 싶었던 것이다.
내 인생의 집에서
나에게 닫힌 창문은 무엇이었으며, 언제 문이 닫혔다가 언제 얼렸었나?
생각해보면 가족과 갈등이 있을 때는 창문이 닫혀있을 때였다.
남편과 결혼 뒤, 아이 낳고 직장 다니며 이 집안의 주요 구성원이었지만
여전히 나는 나일 뿐이었는데 '나' 자체보다는 '부부'로 살아갈 일이 더 많았다.
부부라는 공동체로 의견 일치를 봐야만 하는 순간들은 밀려왔다.
거주지 선택, 자녀 계획에서 '합의'라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 반대의사를 동의로 굽혀야 할 일이 많았다.
지나친 결속감. 하나가 아닌 둘인데 하나로 합쳐져야 하는 거부감,
내 편이고 네 편이지. 네가 내가 아니고. 내가 네가 아닌데,
화장실을 같이 가는 여고생처럼 그렇게 움직였다.
내가 이상하다고 여겼던 모습이 내 모습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섣부르게 판단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내가 너로 옮겨가 뭉쳐진 데 대한 억울함. 표면적인 동의안에 구겨져 들어간 나의 반대 의사는
늘 남편에 대한 기대감과 보상심리를 높여놨고
제대로 된 심적 보상을 받지 못한 나는 조금씩 삐뚤어져갔다.
창문이 닫힌 발코니에서 시들시들 시름시름 앓고 있는 라벤다 같았다.
내게도 가족과의 공동체 역할 이외에 환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 안에서 서로 마시는 공기 말고 다른 공기가 필요했다.
친구들이 보통 30년 이상된 친구여서 그런지,
친구를 만나도 친구와의 또 다른 결속감이 생겨서 환기 작용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친구 하고는 대화의 소재도 고정돼 있었다. 친한 친구와의 만남은 '환기'라기보다 '복습'이었다.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환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고 싶었다.
결혼 뒤에 직장을 십 년 넘게 다녔지만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때가 많았다.
일을 즐기며 해왔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내게도 직장은 즐거움을 주는 곳이라기보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집안의 부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고 노후를 마련해 주는 곳이란 의미가 컸다.
직장인이라는 나의 역할은 '나'에 충실하기보다, 또 '다른 나'를 유지하기 위해 지탱해주는 '도구'일 때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직업은 내게 ' 환기'를 제공하는 데 부족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생 때 차로 학원에 데려다주며, 즐겨 듣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진행하는 것도 좋았고, 매주 화요일마다 서울대 정신과 의사 윤도현 선생님이 고정으로 나와서 상담하는 코너도 흥미로웠다. 운전을 하면서도 최대한 집중을 해서 듣곤 했다.
청취자가 여러 고민을 담은 사연을 보내면 윤대현 정신과 의사는 그에 맞는 해답을 제시했다. 그 해답이 막힌 체증을 풀어주듯 시원했다.
하루는, 내 나이 또래 중년 여성의 사연이 소개됐다. 그 사연 속 여성은 늘 갑갑하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소비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그 사연을 들은 윤도현 선생님은 취미활동을 권장했다. 자신도 의사 생활하면서 그런 기분이 들어서 밴드 활동을 하면서 극복했다고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 인생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취미활동들. 그 당시 내가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되돌아보면 취미활동이 내게는 유일한 바람이었다.
관계의 건강함도, 내 마음의 맑음도 유지할 수 있었던 때는 취미생활에 몰입할 때였다
때로는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20대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 취미활동은
작곡 수업, 유화 그리기, 요가, 발레, 식물 키우기, 드럼 등이 있다.
직장 생활할 때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직장을 관두고는 낮 시간을 이용해서 간혹, 이따금씩 이어갔다.
취미활동은 직장 다니느라 아이 키우느라 여기저기 쓰인 '나'를 오롯이 '나'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줬다.
내 기분만을 위해 이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생각은 소모된 나를 빼곡히 채워줬다.
물론 여러 제한으로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아마 오래 유지했다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죌 정도로 마음이 안정돼 있을 텐데...)
작곡 수업을 들으면서는 초등학생 때 체르니 50번까지 마스터한 내 실력이 완전 가짜였음이 드러났고 (난 악보를 보지 않고 대부분 외워서 쳤었다)
유화를 그리면서는 그림에 몰입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팔이 아프구나.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고,
발레를 하면서 저 발레선생님의 체형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휴대전화는 '통화'의 용도로만 쓰는, 극도의 자제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거북목의 일등공신 휴대전화 웹서핑)
드럼을 치면서 스트레스를 풀겠다던 내 욕망은. 드럼을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정도로 잘 치려면 더 스트레스가 쌓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생활은, 반대의사를 접고 동의를 눌렀던 '나'에 대한 애틋함을 많이 덜어주었다.
새롭게 만난 낯선 사람들이 주는 신선함도 한몫했다.
그들은 나를 나에 대한 정보로 예측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으면서, 판단 없이 그대로 쳐다봤다.
낯선 여행지에 왔을 때,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드는 기분이었다.
나의 일상을 자로 재며 생산성을 따지지 않아도 됐다.
나에게 의무의 완성도를 묻지도 않았다.
신선한 바람이었다.
내 집안의 공기만 마시던 나를 끄집어내서 창문이 열린 베란다 앞으로 데려다줬다. 베란다로 들어온 공기는 유독 달았다. (물론 남편의 취미생활도 적극 후원, 지지하고 있다)
이런 시간의 축적은 노후대비의 일환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된 뒤 아들이 전화 와서
"엄마 이번 주말에 찾아뵈려고 하는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 엄마 바빠. 다음에 와, 오늘 요가 갈 거야"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오늘도 난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바람으로 생기를 찾기 위해.
<사진출처: 픽사 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