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어느 날, 아들이 어버이날 사온 카네이션에 물을 주고 있었다.
때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그 모습을 보고
“엄마. 이 카네이션 열흘 전에 제가 사 온 거죠? 이 꽃 오래가네요?”라고 물었다.
선물한 지 꽤 지났는데도 시들지 않고 곱게 피어있는 꽃이 신기했나 보다
“음 카네이션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을 나타내는 꽃이잖아. 보통 모든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정은 지속적이거든. 그러니까 그 정을 나타내는 꽃으로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꽃인 카네이션을 선택한 걸 거야(라고 내 멋대로 말을 지어냈다)"
거기까지 하고 말았어야 하는데 주책맞게 다음 말이 줄줄 새 나왔다.
“장미는 금방 시들잖아. 장미는 남 녀 간의 사랑을 상징하거든. 남 녀 간의 사랑은 금방 변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아직 첫사랑도 못해본 아들한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린 것 같아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아들이 첫사랑을 마주할 때의 감성이 이 정도 말로 깨지진 않을 거라고 합리화해본다.
30분쯤 지났을까? 남편한테 톡이 온다. 열어보기도 전에 기대에 부푼다. 이 시간 즈음 오는 톡의 내용은 대충 알만한 내용이니까.
"오늘 저녁 먹고 간다. 미국에서 친구 oo이가 왔거든"
역시나!!! 읽자마자 바로 쾌속으로 답변한다.
"ㅇㅋ"
보통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남편이 5시 전후 연락이 온다면 저녁 준비하지 말라는 연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나한테 야근은 없다! 작은 아이 저녁을 차려주고 학원에 데려다주면 오롯이 3시간은 자유시간이다.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파고든다.
신혼 초였다면 어땠을까?
"오늘 저녁 먹고 간다. 미국에서 친구 oo이가 왔거든"
"얼마나 늦어?"
하고 질문을 하고
"몇 시까지는 들어와"하고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이젠 남편이 몇 시에 들어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시간. 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최대 관심을 집중한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 유명한 대사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한테 외면당하고 나서 처절함을 가리며 담담히 읊조리는 대사라서 울림이 컸다. 그 당시 영화를 볼 때만 해도 그렇게 말하는 남주인공의 마음에 기울어 상대방 여주인공을 째려봤었다.
그 후 수십 년, 결혼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난 사람으로 그 대사를 다시 듣는다면 여주인공 대신 아주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변하니까 사랑이지!”
사랑은 변한다. 상하거나 소멸되기도 하고 은은해 지거나 깊어지기도 한다. 줄어들거나 자라기도 하는 걸 보면 살아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이다.
첫사랑의 밀도와 순도가 고스란히 보존되는 것은 실온 보관이 아닌 냉동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헤어진 뒤, 실제 생활에서 사라져 우리의 머릿속에만 남은 첫사랑은 급속 동결 후 진공 포장돼 냉동고 안에 자리 잡는다. 당연히 유통기한이 길다. 우리의 실생활 속, 온도와 습도를 견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결혼으로 이어진 사랑은 실온으로 보관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그래서 어쩌라고?" 이 말이 뇌리에 스칠 것이다.
"그래서? 변하니까 결혼하지 말고 싱글로 살라고?"
"변하니까 그냥 알아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물론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 위에 빠져나갈 곳을 마련해 두지 않았는가!
'소멸되거나 상하기도 하지만 은은해지거나 깊어지기도 한다'라고. 우리는 사랑이 소멸되거나 상하지 않고 깊어지게 가꾸어야 한다. (왜 여기서 너나 잘해!라는 환청이 들리는 걸까?)
흔히들 결혼을 사랑의 열매라고 한다. 난 이 말에 태클을 걸고 싶다. 열매는 거두면 끝이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점이 아니다. 출발점이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가 아닌 씨앗이다. 결혼을 시작으로 잘 가꾸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고 다시 쉬었다가 또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는 선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 반대로 꽃도 피어보지 못하고 열매는커녕 뿌리까지 썩을 수도 있다.
결혼하기 전, 사랑에 빠지게 한. 한 가지 이유가
왜 사랑하는지 모를 백가지 이유를 덮었듯이
결혼을 하고 나서, 사랑하지 않아도 될, 상대방의 한 가지 잘못이
사랑을 시작했던 백가지 이유를 삼키기도 한다.
명절날 밤, 전날 부친 전을 삼단 찬합에 담아 들고, 새벽부터 큰댁과 시댁을 오가고 돌아오는 차 안.
"아 허리 아파. 나 차에서 좀 자야겠으니 말 시키지 마."
"내일부터 푹 쉬면 되겠네."
"그럼 안 쉬어? 쉬지? 자기도 쉬잖아"
"왜 그래. 난 그냥 쉬면 나아질 거라는 거야."
나한테 필요했던 말은
"그래. 애썼네. 힘들겠다. 고마워."
였을 뿐인데
남편은 뭔가를 해결해주려고 한다. 자신이 공휴일을 지정하기라도 한 냥 선심 쓰듯 내일을 끌어와 내민다.
남편은 남편대로 내가 전을 다 부쳐가기 싫다는 의미로 넘겨짚었다. 그 힘듦을 인정하면 다음부터는 안 하게 되리란 염려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난 할 일을 안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하고 나서 힘들지 조차 말란 법은 없다.
여자들의 투정은 거의 그저 알아달라는 것이지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어렵다면 그냥 "그래, 그래"만 하면 된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흘려버렸을 말 한마디가
남편이 했기 때문에 대역죄인이 된냥 남의 편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친구가 했다면 아량으로 사소하게 넘겼을 실수가
남편이 했기 때문에 거대하게 부풀어 집안을 가득 메우기도 한다.
그렇게 남의 편이었다가, 남이었다가, 남편이었다가 순환하면서 그 자리를 맴돈다.
식물 키우기가 취미인 나는 식물을 키우면서 나도 자라고 있다. 전에 몰랐던 사실을 하나씩 알아간다.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을 주기 전에 먼저 식물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식물마다 원하는 환경이 각각 다르다. 식물이 원하는 방식에 맞춰서 식물마다 다른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의 모범답안으로 식물을 키우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할지, 무엇을 싫어할지 읽고 서로 조율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랑을 주기 전에 먼저 상대방이 원하는 마음을 읽는 것. 그것이 존중이다. 시랑은 존중을 먹고 자란다. 존중을 먹고 자란 사랑은 깊게 성숙한다.
결혼하고 나면 서로를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려는 노력에 느슨해졌던 것 같다. 마음을 읽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해주면서 서로 어긋나곤 했다.
상대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 거기에서부터 사랑의 보존은 시작된다.
사랑은 변한다. 단 어떻게 변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이미지 출처:pixabay>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