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서관에서 학부모 봉사할 때 일이다.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한 학생이 나이 드신 선생님께 혼나고 있었다. 선생님은 학생을 꾸중하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면에 학생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 친구들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몇 년 전 큰애 사춘기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말을 안 듣는 아이를 혼내면서 어느덧 난 '혼을 내'지 않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혼을 내는 듯, 화를 내는 엄마인 나와 아이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눈에서 경고의 불빛을 쏘아대며 나를 밀어내는 아이를 보며 난 불나방처럼 더 달려들었다.
내 머릿속에는 보상심리가 있었고 그것은 화를 더 돋우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나처럼 헌신적인 엄마가 어딨어?' '내가 좋아하는 일도 관두고 네 뒷바라지만 하잖아!'
아들의 머릿속에는 엄마의 애정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그것이 점점 엄마를 밀어내게 했다.
' 흥,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나 서울대 보내고 엄마가 자랑하려는 거 아닌가?'
' 누가 직장까지 관두고 날 위해 달래? 그냥 엄마의 인생을 살라고. 부담스럽다고!'
되짚어 보면 나의 불만보다 아들의 해석이 더 맞았던 것 같다.
난 집안의 장손인 큰애 입시를 잘 치르고 싶었다. 당신의 학벌에 대한 자부심과 그에 따른 편견이 심한 양가 부모님 생각도 쉽게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마음속엔 '이것 좀 보세요. 전 이렇게 잘 해냈어요'라고 으스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 감정이 포함돼 있었다.
잘못된 목표 설정은 과정까지 변질시켰다. 학부모 모임은 비교의 장이 되어 모임 뒤 집에 돌아오면 아이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이야기를 들이대며 아이를 채근하기 바빴다.
예민한 큰아이는 엄마 잔소리의 순도를 명확하게 짚어냈고 난 아들의 순도 테스트에서 탈락했다. 그만큼 엄마의 말은 우산 위 빗방울처럼 겉돌곤 했다.
얼마 동안이나 무의미한 전쟁을 치렀을까?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인터넷 카페에서 입시 정보를 모으고 있던 중이었다. 무심하게 조회수가 높은 글을 클릭해보니 거기엔 출처가 불분명한 퍼온 글이 있었다.
수능날 아침, 수능 점심시간에 먹을 도시락으로 미역국을 싸준 한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도시락엔 어머니의 쪽지도 들어있었다.
" 네가 수능을 망친다면 그건 미역국을 싸준 엄마 탓이야. 그러니 넌 마음 놓고 시험 봐."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고 이 글은 출처를 찾을 수도 없어서 밝힐 수 없다)
컴퓨터 화면만 보다 뻑뻑해진 눈에 열기와 물기가 차올랐다.
'아 엄마는 저래야 하는 거구나. 난 항상 아이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아이를 통해 나를 위하고 있었구나'
아이 사춘기로 힘든 만큼 사춘기에 관한 책은 다 섭렵했던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글이었다.
그 뒤, 큰아이한테 고정했던 나의 채널을 다른 것에 돌렸다.
주말이면 식물원에도 가고 농장도 가고 꽃시장에도 갔다.
주중엔 요가도 했다.
잔소리는 다섯 번 중 네 번은 삼키고 한 번은 짧고 명료하게 했다.
아이의 눈에 켜졌던 경고등은 빨간색에서 주황색으로 잦아들더니. 어느새 초록색으로 자리 잡았다.
그즈음부터 작은아이와 일주일에 한 번씩 꽃시장에 가곤 했다. 큰애 일정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외곽으로 놀러 갈 시간이 안됐다. 작은 아이는 꽃시장에 가면 다육식물 파는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구경했다.
검은 고무 주머니에 담긴 다육식물을 한 아름 골라 담은 아이한테
" 만날 죽이지 말고 제대로 된 큰 화분을 사봐"라고 했지만
작은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책상 앞에 다육이를 놓았다.
그 다육이는 정확히 이삼 주면 죽어버리곤 했다.
여린 감성의 작은 아이는 정성껏 물을 줬지만 다육이에겐 버거운 양의 물이었다.
다육이는 물을 많이 원하지 않는다.
가끔, 어쩌다가, 원할 뿐이다.
아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책상 위에 다육이를 놓고 늘 바라봤지만
정작 다육이가 원하는 자리는 벽을 바라보는 책상 위가 아닌 창가 자리였다.
작은 아이는 다육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방식으로 다육이를 사랑했다.
물은 적게 필요로 하고 햇볕은 많이 필요로 하는 다육이한테
물은 자주 주고 햇볕으로부터 등지게 놓았던 것이다.
다육이가 필요로 하는 햇볕은 '믿고 지켜보는 사랑'이고
다육이가 조금만 허용하는 물은 '침범하는 사랑'이다.
다육이 뿌리가 흔들흔들 썩어가는 걸 보며, 안타까워하던 작은 아이 모습에
엄마를 밀어내는 큰 아이를 마주하며, 좌절했던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우리는 둘 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데 실패했었다.
그 실패는 사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의 순도 조절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육이의 마음을 읽기보다, 다육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던, 작은 아이의 마음이 문제였다.
큰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큰아이를 내 전시물로 봤던, 내 마음이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거부당했던 것이다.
그즈음부터 작은 아이방 베란다에 다육이를 놓았다.
문을 열면 책상 앞에 앉아 딴짓하던 아이에 일차적으로 시선이 머문다.
재빨리 시선을 거둬 다육이에게 보낸다.
다육이가 가르쳐준다.
'물은 조금. 햇볕은 많이'
하려던 잔소리를 삼키고 문을 다시 닫는다.
<이미지 출처:pixabay>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