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터넷에 '기쁨을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 말은 내 아픈 기억을 소환시켰다.
몇 년 전, 기쁜 소식을 들고 친구를 찾아갔을 때, 친구의 눈에 비친 감정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다.
분명 그 눈에서는 뺄셈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 기쁜 상황에서 친구 자신의 처지만큼을 뺐을 때 나오는 답의 양만큼의 씁쓸함. 그 씁쓸함을 보고 친구가 나를 질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반만큼 닫았던 것 같다.
어려운 일이 몰아닥칠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손을 잡고 위로해 주던 친구가 나의 기쁜 일에는 자신의 처지를 동시에 비춰보며 한걸음 물러서는 건 왜일까?
아마 상대방의 슬픈 일을 통해서도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게 됐을 것이다. 상대방의 딱한 사정과 자신의 상황을 나란히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저울질 결과, '내 상황은 이만하면 괜찮구나' 하고 이기적인 위로를 얻었을 수도 있다.
딱히 상대방인 친구가 잘 되길 바라지 않아서가 아니다. 더더군다나 친구가 안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이기에 눈앞에 펼쳐진 상황과 자신을 동시에 펼쳐서 저울에 올려놓게 되는 것일 뿐이다.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친구가 자신의 상황을 덜어내고 온전히 내 기쁨에만 흠뻑 빠져주기를 바랐던 내 마음이 무리일 수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애초에 내가 더 이기적인 것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제 같은 날이다.
이즈음 눈에 띄는 식물은 단연 포인세티아다. 추운 겨울에 빨갛게 물든 잎은 꽃을 대체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집 거실 창가에도 매년 크리스마스 열흘 전엔 포인세티아가 줄지어 나란히 서있다.
시즌을 넘기지 못하고 매년 새로 사야 하는 번거로움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포인세티아를 대체할 만한 식물을 찾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포인세티아의 꽃말은 '축하합니다''축복합니다'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사실은 추위에 약하단다. 멀리 멕시코가 원산지인 이 아이는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에 우리의 들뜬 기분을 장식해주기 위해 찾아오지만 자기 자신은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빨간 잎은 자신의 꽃의 빈약함을 보완하기 위한 대체술이다. 우리가 꽃이라고 보는 붉은 잎은 꽃이 아닌 '포엽'이다. 포인세티아의 진짜 꽃은 잎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노란 씨앗같이 생겼다. 보잘것없는 꽃의 모양을 타고난 탓에 꽃으로는 부족해서 잎을 붉게 물들여 화려하게 자신을 장식한다. 포인세티아의 잎은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밤이 길어지고 낮이 짧아지게 되면서 점점 붉게 물들어간다.
그렇게 자신의 상황을 힘겹게 극복하면서도 포인세티아는 우리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꽃이 빈약해 잎을 빨갛게 물들인 채. 열정을 더한 붉은 마음으로 축하를 건네는 것이다.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연락하는 친구의 순서를 정하는 데 공들이는 편이다.
내 기쁨이 가능한 오래 유지되려면 데칼코마니처럼 나의 감정을 재현해줄 친구까지는 아니라도 내 앞에서 대놓고 저울질하는 친구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애써 높이고 기대는 내려놓으려는 나의 태도를 무장해제시키곤 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내 마음을 전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내 마음을 복사해 준다. 몇 년 전 어느 날, 기쁜 일을 알리려고 만났던 첫 번째 친구한테 받은 실망을, 두 번째로 만난 이 친구가 다 덮어주고도 남을 만큼 축하해줬다.
그 친구는 평소에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다.
늘 무덤덤하게 자신의 주파수를 일정하게 고르는 친구다. 어려서 힘든 상황을 겪었고 그래서 인생의 굴곡이 남보다 깊었던 친구, 37년 친구지만 친구의 가정환경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어느 날 자신의 지난 아픔을 이야기하길래 그 앞에서 같이 한없이 울어버렸다. 그 전에는 어렴풋이 알고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그런 친구가 나의 기쁜 일엔 한없이 소리를 높여 축하해 준다.
그 순간 자신과 나의 상황을 비교하지 않고 오롯이 '내'가 되어준다.
마치 따뜻한 멕시코에서 추운 한국에 넘어와, 꽃 대신 잎으로 크리스마스를 붉게 물들이며 축하해주는 포인세티아 같다.
어쩌면 그 친구와 포인세티아의 공감능력은 자신의 아픔을 딛고 피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자신의 고통을 상대방을 향한 포용력으로 승화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대부분의 아픔은 그저 움츠림으로 변질되곤 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와 포인세티아는 자신의 고통을 내려놓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연다.
그 둘이 한없이 축하를 건네는 모습은 드물기 때문에 더 귀하고 값지다.
여느 때보다 일찍 눈 뜬 아침, 문득 그 친구의 축하를 받고 두배로 기뻤던 몇 년 전 어느 날을 생각한다.
진정한 기쁨의 완성은 함께 나눌 이와 마주했을 때라는 걸 느낀 하루였다.
이 아침, 그 친구에게 축하해줄 일이 한가득 찾아오기를 간절하게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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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