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일정 없는 주말 아침, 남편이 물었다.
"어디 나갔다 오자. 가고 싶은데 있어? "
"아무 데나"
"그럼 극장 갈까?"
"요즘 볼만한 영화 없지 않아?"
"그래? 그러면 산정호수 가서 바람 쐬고 올까?"
" 아... 지금 주말인데 차가 밀리지 않겠어? 그냥 가깝고 편한 곳 없을까?"
"그래 그게 어딘데?"
"아무 데나"
'아무'를 저렇게 습관처럼 말하던 때가 잠시 있었다( 원래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유사품으로 아무거나 먹어. 선물은 아무거나 좋아. 아무 때나 보자. 등이 있다.
'아무'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다수가 의견을 하나로 수렴하려고 할 때
빠른 결정으로 시간을 아끼기 위해 기권표를 내는 아무거나. 아무 데나. 아무 때나.
또 하나는
'나도 내가 어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으니 네가 한번 맞춰봐'의 아무 데나, 아무거나.
이 아무의 의미는 애니띵이 아니라 썸띵 스페셜을 기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 내겐 딱히 끌리는 게 없으니 네가 한번 내 마음을 맞춰봐. 요리의 대가들이 자주 쓰는 말인 양념은 '적당히'넣으란 말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말이다.
저 위 대화의 아무데나는 후자의 아무 데나다.
한때, 장기간 피로가 극에 달해서 생각을 멈추고 살던 때가 있었다. 나 말고 신경 써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직장에, 아이 둘에, 편찮으신 양가 어르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것을 당연히 잠시 접어 두어야 했던 때.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직접적인 거부반응으로 알 수 있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탐구와 관찰이 필요한데 그 당시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라는 인간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안에서부터 밖으로, 면을 채워가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로, 밖에서부터 선을 그어 규정하고 있었다.
저렇게 아무 데나를 남편한테 던지고 나면 그때부터 스무고개는 시작됐다.
스무고개를 넘듯이 넘어 겨우 썸띵 스페셜에 맞는 아무 데나를 찾았다. 이제 그 아무를 먹거나 가거나 하지만 성공할 확률은 많지 않다. 애초에 내가 뭘 원하는지는 내가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차 안 공기는 퉁명스러웠고
운전하는데 수시간 쓴 남편은 남편대로 불만이 생겼다.
'전에는 안 그러더니 요즘 왜 그래?'
'아 몰라.'
3년 전 어느 날, 하교 뒤 집에 들어온 작은 아이는 화분을 하나 안고 왔다.
아이는 집안에 있는 수많은 화분을 뒤로하고 생전 처음 화분을 선물 받은 것처럼 흥분해서 말했다.
"엄마. 오늘 가입한 텃밭 가꾸기 동아리에서 받은 화분인데요. 이 식물은 물을 안 주면 잎새를 축 떨군대요. 그래서 그걸 보고 물을 주면 된다네요.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절대 물 주시면 안 돼요."
스윽 보니 내 취향의 식물이 아니었다. 잎 색깔도 딱 사전에 나와있는 초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잎에서 나는 번들거리는 광택도 거슬렸다.
아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래"하고 흘려 들었다.
내 머릿속에는 동아리 선택에 대한 아쉬움만 남아있었다. 몇 년째 식물 농원과 꽃시장 가는 게 취미인 아이는 동아리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텃밭 가꾸기'동아리로 일관되게 선택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침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카페인 공급이 절실해서 거실로 나와 소파를 지나 치는데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
축 쳐진 잎사귀로 "목마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스파티 필럼
고개를 돌리니 어제 낮까지 탱탱하게 솟아있던 스파티필룸 잎사귀가 축 쳐져있었다.
"어머"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정말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목마릅니다."
눈으로 말을 듣는 것 같았다.
물이 필요한 때를 정확히 콕 찍어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 때나'가 아닌 '지금'이라고.
냉큼 화장실로 들어가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줬다.
그 말의 흡수력이 좋았던 것은
명령형인 "물 좀 주세요"가 아닌,
'나' 전달법으로 '지금 목마릅니다'라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식물 키우기를 오래 했다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식물 키우기'라기보다 '죽이기'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식물을 떠나보냈다. 도중에 식물 키우기를 포기하려고도 했다. 더 이상 식물 키우기를 실패하다가는 난 죽어서 좋은 곳으로 못 갈 것 같았다.
식물 키우기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물 주는 타이밍이었다. 물을 흠뻑 주고 나서 흙이 다 마르기 전에 또 물을 준 경우가 실패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식물의 상태를 관찰하고 마음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보면 잎 끝자락이 누렇게 변해있었다. 그 후로는 아무리 좋은 영양제를 사다 꽂아줘도 소용없었다. 일단 병이 생긴 뒤에는 시름시름 앓다가 떠나는 식물이 많았다. 어떤 꽃 화분은 아픈 줄도 몰랐는데 하루 사이에 폭삭 시들어 죽은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만난 스파티필룸은 내게 신세계였다.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식물, 말을 볼 수 있게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처음으로 식물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실 한 구석에서 잘 자라고 있다.
남편과의 주말 시간. '내 마음을 읽어봐'하고 나도 모르는 마음을 남편한테 읽으라고 떠넘기기 전에
내가 좀 더 내 마음을 신경 쓰고 알아봤다면 그 시간은 더 즐거웠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상대방이 알아주기 바라는 것은 애초에 욕심이었다.
잘 모르겠던 내 마음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때로는 분명한 내 마음도 상대방과의 소통 실패의 경험이 쌓여
'말해봤자 뭐해'하며 꾹꾹 담아놓기도 한다.
그 쌓아놓은 마음은 다른 색을 입힌 말로 나온다
"피곤해"
"아 몰라"
"됐어"
그 말로는 상대방에게 제대로 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다 애초에 메시지가 담겨있지 않으니까.
사실 내 "피곤해'는
'난 지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나 좀 내버려 둬'였고
"아 몰라"는
'나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것은 알아. 그런데 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 힘든데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더 힘들어'였다.
"됐어"는
'어차피 당신한테 말해봤자 내 마음을 이해하겠어? 그냥 투정 부린다고 생각하겠지? 말하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였다.
짧은 말 한마디로 줄여 말했지만 그 말 안에 진정한 의미는 담겨있지 않았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 말로는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책이 아니다. 나를 읽어주기 기대하는 건 무리일 수 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타인이 읽어주길 바라지 말고 내 마음 상태를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그것부터 소통이 시작된다.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