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도 Oct 11. 2020

'거짓'칭찬은 거짓말일까요? 칭찬일까요?

조화는 꽃일까요? 물건일까요?



"어머! 그 블라우스 어디에서 샀어요?  분위기 있네요. 자신에 맞춰 스타일링을 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좀 갖춰입는 스타일이 잘 어울려요."

"..... 네. 고마워요."

한참 뒤 다음 모임에서.

" 그 청바지 새로 산 거예요? 요즘 유행하는 건가 보죠? 역시 캐주얼한 차림이 어려 보이고 잘 어울려요."

".....??  아.... 네."

만날 때마다 칭찬을 하는 지인이 있다. 그 지인을  만나면 처음엔 으쓱하다가 잠시 후에는 좀 혼동되곤 한다.

'지난번에는 정장 스타일이 어울린다더니 이번엔 캐주얼이야? 뭐가 맞는 거지?'

지인 말 안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차멀미가 나기도 한다. 종합해보면 그 순간을 다 칭찬하고 싶은 마음인 것은 알겠는데 까칠한 나의 귀에 좀 거슬린다. 진정성이란 필터에 걸려든 그 지인의 말은 어느 순간부터 반으로 동강 잘라서 그만큼만 유효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다소 과장되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칭찬을 건넨 부풀린 '칭찬'임에는 틀림없다.


<판정: 칭찬. 주의 거품이 있음>



십여 년 전, 시부모님께서 병원에 입원하셔서 퇴근 뒤 병원에 가 있던 나날이 지속됐다.

그때, 병문안 온 시댁 친척분이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아우 요즘 세상에 이렇게 착한 효부가 어딨어?  참 착해. 효부야. 효부."

"아.............. 네."

칭찬을 들었는데 기분이 좋다기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그 해 추석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내게 잔소리를 하던 분이 갑자기 칭찬을 하는 것에 적응을 못한 것도 있다. 그런데 그보다 이 칭찬이 씁쓸했던 것은 칭찬을 들은 내게 부담감을 얹어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저 친척분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시부모님 봉양 잘해서 착한 며느리가 돼야 해.'라는 암묵적 의무 강요가 들어있다.  

'효부다'가 '효부여야 한다'로 들린 것은  내 '행동의 과정'에 대한 '칭찬'이 아닌 나의 '성품'에 대해 칭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워낙 까칠해서 이런 느낌을 받았나 했지만 그 뒤 아이를 키우면서 읽은 책에서도 이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뉴욕대학 교수인 하임 G 기너트는 개인적인 성품에 대해 칭찬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넌 참 훌륭한 아이야." "네가 없으면 엄마가 어떻게 살겠니?"  이런 말은 아이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또한 아이에게 걱정을 안겨줄 수도 있다. 아이는 자신이 이런 칭찬을 받을 만큼 훌륭한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본모습이 폭로될까 봐 두려워할 수 있다. 또는 오히려 나쁜 행동을 통해 미리 고백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어야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칭찬해야 할까? 인격에 대해 칭찬하지 말고 상대방의 노력과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저 위의 친척은 내게 "에휴 애쓰네. 아이도 어리고 직장도 다니는데 병원까지 다니느라 고생이 많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진정한 칭찬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엄마의 집안일을 도와줬을 때, 아이한테

"엄마일을 도와줘서 고마워."는 좋은 칭찬이고. "넌 참 착한 아이야"라고 하는 것은 좋은 칭찬이 될 수 없다.

아이한테 착한 아이가 돼라는 의무감만 얹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착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좀 착해져라'는 의미로 던지는 "넌 참 착한 아이야"일 경우에는 더욱 위험하다. 이경우, 칭찬은 아이를 향한 또 다른 억압이 될 뿐이다.  이 말은 사실 거짓 '칭찬'이 아닌 '거짓' 칭찬일 뿐이다.


<판정:칭찬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칭찬이 아닐 수도 있음>




이렇게 칭찬하나에도 민감한 채, 나만의 틀에 갇혀 살던 나는 '칭찬'과 '약속 잡는 것'에 넉넉한 사람들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내 주변에는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투척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루는 친구를 만나서 전시회를 둘러본 뒤 카페에 들어가서 주문을 넣었는데 그때 작은 아이로부터 집에 일찍 온다는 문자를 받았다. 어쩌지? 하다가 주문한 음료수를 포장해 들고 나왔다.

"같이 집에 갈까?"

"그래 난 한두 시간 더 시간 있어."

친구와 같이 아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섰다. 친구는 몇 년 만에 온 우리 집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뀐 침대 프레임이 그 친구 눈에 가시처럼 박혔나 보다.

" 아무도야. 얘. 이게 뭐야? 웬 검정 가죽 프레임? 너무 칙칙해. 꼭 침대가 아니라 관을 짜 놓은 거 같잖아."

"............???? 응? 너무 까맣지? 나무 프레임으로 하려다가 나무는 아이가 부딪치면 멍들까 봐 가죽으로 했지."

그렇게 말하고 넘어갔다. 친구가 가고 저녁 즈음. 여느 때처럼 버퍼링이 풀리는 시간이 돌아왔다. 묘하게 그 단어 하나가 머리에서 뱅글거렸다.

'관? 관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관이 뭐야? 생각할수록 열 받네? 관? 죽어 들어가는 관?'

씩씩거리며 남편한테 친구 흉을 봤다.

"도대체 관이 뭐야? 전화해 한마디 해줄까?"(제발 내 말에 호응하라고!)

그때, 남편은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네 평소 지론이 가식보다 진실이라며? 네가 제일 싫어하는 게 가식 담은 칭찬이잖아. 너하고 닮았네 뭐."

여느 때처럼  안티 와이프 발언을 해대는 남편에 화는 가속으로 질주했다. (요즘은 내 교육의 효과로 나아졌다)

"아 짜증 나. 그게 진실이야? 악담이지? 당신한테 말한 내가 잘못이지. 다시는 말하나 봐라."

그리고 방에 들어가 자버렸다. 평소 잠이 보약인 나는 푹 자고 일어나니 '관이든 침대든 그러든 말든' 모드가 돼 버렸다. 어제까지 관이라는 말에 죽음의 그림자가 무섭게 드리워졌다면, 자고 일어나니 '어차피 사람 다 죽는데 뭐' 이런 생각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어제보다는 뒤끝이 가늘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친구의 '관' 발언은 고이 접어  불쾌한 말을 담은 서랍장 두 번째 칸에 넣어버렸다. "쾅"


<판정: 거짓보다 못한 불쾌한 진실>




수년 전 겨울,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시즌 즈음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졸업식마다 꽃은 미리 예약해 맞춰 놓는 편이었다. 그런데 식물을 키우면서 점점 꽃다발을 사는 것에 흥미를 잃어갔다.  아무리 꽃을 세련되게 모아놓아도 내 눈에 동강 잘린 가지 밑동만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인공호흡기라도 단 듯 매달아놓은 물을  머금은 스펀지도 못마땅했다.

꽃을 주문은 해야겠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루던 즈음.

옆동네를 지나가다가 예쁜 꽃집을 봤다. 졸업식 전이어서 그런지 꽃다발이 여러 개 포장돼 있었다.

"여기 이 꽃다발 좀 보여주세요"

"네. 이건 비누로 만든 거예요.:

비누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아주 정교해서 얼핏 보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좀 인위적인 맛이 나긴 했다. 더 둘러보다가 구석에서 톤 다운된 색상의 조화를 발견했다. 순간 끙끙대던 실력 정석 책의 마지막 연습문제가 풀린 기분이었다.

"이거 주세요"

가격도 묻지 않고 말해버렸다. (이건 실수) 생각보다 가격이 엄청 비쌌다.

난 아이 졸업식에 이제 동강 잘린 꽃다발을 들고 어설픈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반영구적인 이 꽃다발로 3년 뒤 중학교 졸업식까지 재활용도 가능할 거라는 야무진 꿈도 꾸고 있었다.

가짜 꽃. 조화도 충분히 예뻤다. 게다가 아이의 졸업을 축하하는 내 마음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날 난 '가짜' 이 아닌 가짜'꽃'을 전한 것이다. 


<판정: '가짜'이 아닌 가짜'꽃 선물'= 가식이 아닌 진심>



그 후로  만날 때마다 이 옷도 어울린다 저 옷도 멋있다 하는 지인을  만났다. 그 지인은 참 한결같았다.

"어머 요즘 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환해요."

그전날 밤,  밤새 잠을 설치고 카페인을 들이붓고 나간 날이었다:;

" 아.... 네." (이미 내 얼굴은 찡그리고 있다)

그 지인과의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오다가 문득, 내 생각의 회로를 바꾸고 싶어 졌다.


만날 때마다 나를 칭찬하는 지인의 말속에 진심이 1퍼센트라 해도, 그 지인에겐 근본적으로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다. 1퍼센트의 진실과 99퍼센트의 상대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다.

내가  아이 졸업식에 '가짜' 꽃이 아닌 가짜'꽃'을 샀지만, 진짜 꽃을 살 때와 똑같이 아이가 기뻐하길 바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 과장된 '칭찬'을 하는 지인도 내가 그 칭찬을 듣고 기분 좋아지길 바랐던 것뿐일 것이다.

반면 자신의 솔직함을 무기로 삼는 친구의 말속엔 진심이 100퍼센트라 해도, 그 친구는 기본적으로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더 배려심 있는 행동이고 후자가 더 자기중심적 태도였다. 물론 '거짓'칭찬으로 상대방을 전두 지휘하려던 그 친척분도 자기중심적 지배자의 태도이다.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칭찬은 다소 부풀어졌다고 해도 거짓'칭찬'이다.

상대방에게 의무를 부과하려는 의도가 있는 칭찬은 '거짓' 칭찬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는 진실은 진실보다는 '불쾌함'으로 다가온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는 "타인의 사랑은 솔직함의 보상이 아니라 친절함의 보상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타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솔직하기보다 친절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본다. 


내 마음을 뒤적여 본다.

내가 꺼리는 사람의 모습과 내가 끌리는 사람의 모습을 나열해 본다.

내가 꺼리는 사람 중에, 나한테 자신이 하는 말이 솔직하다는 이유로 나를 할퀴고 간 이들,

내가 끌리는 사람 중에, 나를 북돋고 위로하려고 자신의 말을 예쁘게 포장해 건넨 이들이 서있다.

아무래도 나조차도 후자를 더 선호하면서 나는 전자로 살아왔던 것 같다.

아직은 포장하는 법에 서툴지만 그 대신,  상대방의 좋은 점을 열심히 찾아내는 시각을 갖추려고 한다.

상대방의 모습 안에서 좋은 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보물 찾기'만큼 흥미롭기 때문이다.





+) 이 글에서는 '이상적인' 칭찬은 다루지 않고 '이상한' 칭찬만 다루았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칭찬은 '진심'을 예쁘게 포장해 전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제공 :픽사 베이>: 사진 속 꽃은 조화입니다.


이 글은  21.3월에 출간한 책<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에 담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

매거진의 이전글 꽃에 비춰보는 '사랑을 대하는 태도' 유형 분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