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식물을 애도하며
마흔 살에 들어설 무렵이었던 것 같다. 문득 보게 된 나의 모습, 나의 생활, 내 좌표 모든 것이 낯설었다. 분명 그때까지 성실하게 걸어왔는데 도착해서 보니 '여기가 어딘가?'라는 생각뿐이었다.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주저앉아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건지 한걸음 한걸음 되짚어 봤다. 방향 설정의 각 지점마다 주변의 한 마디씩이 새겨있었다.
"아무도야. 그렇게 하는 게 도리에 맞는 거야"
"아무도야. 지금은 네 일보다는 그 일이 더 중요한 거야."
"아무도야. 누구나 다 힘들어, 그 정도는 그냥 참고해야 해. 그게 인생이야."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은 샛길로 빠진 저 산골짜기인데 다들 직진을 하라고 말하곤 했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당시 그 말들을 듣는 순간, 저항감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타인의 말에 내 생각을 끼워 맞추고 그 길로 따라갔다. 내 발보다 꽉 끼었던 신발 때문에 내 발뒤꿈치에는 늘 물집이 잡혔다. 잡힌 물집이 터지고 나면 다음 물집이 생기곤 했다. 신발을 벗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신발에 발을 맞추고 버티곤 했다. 아무리 견뎌도 신발에 맞춰 발 사이즈가 변하지는 않았다. 아프다고 신음이 스멀스멀 나오려고 할 때마다 어김없이 칭찬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 박수소리에 나오려던 목소리는 묻히고 나는 또 발끝을 보며 직진했다.
가는 길마다 칭찬의 박수를 받을 때 한 번쯤 두리번거려보며 되짚었어야 했다.
저항감이 없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었어야 했다. 약간의 저항감은 나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저항감이 없이 나아간다는 건 내가 끌려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내 안에 내 의지와 확신이 있었다면 타인의 말과 부딪쳐 내적 갈등을 일으켰을 텐데... 난 다수가 한 목소리로 하는 말들을 검증 없이 진리로 받아들였다. 안 맞는 신발에 발을 욱여넣고 절뚝절뚝 걸어 나가는 것이 생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오히려 꾹 참는 나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
도착한 뒤 내 모습은 한 번도 마음속에 그려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거울 하나 주어지지 않는 곳에 살다가 수십 년 만에 내 얼굴을 바라본 것 같았다. 거울 속에는 낯선 이가 마주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식물이 우리 집에서 떠났다. 식물의 마음을 읽기에 서툴렀던 나는 식물을 키우기 시작한 지 한참 후에야 식물마다 원하는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서툴렀다기보다 무심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좋다는 영양제는 이것저것 사다 심었지만 손가락만 몇 번 까닥거리면 되는 <산세베리아 잎이 누레지는 원인> 검색조차 하지 않았던 걸 보면.
진정한 소통을 할 마음의 준비가 안된 내게 식물이 상태로 호소하는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소통은 말로 나가 귀로 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눈과 눈의 마주침이 있어야 한다. 식물과 눈 마주침을 위한 평형 맞추기에 소홀했던 내게 식물의 상태를 읽을 시선은 부족했다. 어설프고 서투른 판단력은 행동력만 강화했다.
"음.. 잎이 누렇네 물을 더 줘야겠어"
'아냐 아냐... 난 뿌리에 물이 마르지 않아서 지금 뿌리가 상하고 있어'
"음... 왠지 시들한 걸... 햇볕이 부족한가 보네. 더 볕이 강한 곳으로 옮겨야겠어."
'아냐. 아냐 햇볕은 이미 충분해, 오히려 너무 더워. 난 신선한 바람을 맞고 싶어. 제발 창문 좀 열어줘.'
식물은 수동적인 듯 수동적이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환경의 조건, 삶의 방향을 수정하지 않는다. 바람이 필요한데 햇볕으로 대체 만족하지 않는다. 물을 그만 마시고 싶을 때는 그만 마시고 뿌리를 상할 뿐이다. 소통이 안 되는 상대를 만나면 시들면서 저항한다. 마치 침묵시위하며 단식 투쟁하는 독립투사 같기도 하다. "원하는 것을 달라"라고 외치지만 않을 뿐, 온몸으로 항거한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자신이 정한 노선으로 나아간다.
얼핏 보면 식물만 피해자인 것 같지만 식물을 무심하게 대한 나한테도 그 슬픔은 전해진다. 식물만 시드는 게 아니라 식물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도 기쁨을 거두게 된다. 소통이 아닌 불통으로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소통이란 사전적 의미로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는 말이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막힘이 없이 들고 난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 확신을 담고 있지 않았던 과거의 나는 소통을 통해 타인의 생각이 내 안에 들기는 하지만 날 것이 없었다. 난 그저 타인의 의견을 받기만 했다. 그 결과 소통이 아닌 '주입'으로 살아왔다.
외부 공기를 받아들이고 집안 공기를 내보내는 창문과 비슷한 맥락이다. 집안 환기가 중요하듯이 타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내 말을 전하며 서로 '통'하는 것은 필오한 과정이다. 그러나 미세먼지 가득한 날 문을 여는 건 환기가 아닌 오염일 뿐이었다. 되돌아보면 난 창문을 열어만 놓고 닫지 않았던 것 같다. 문은 열기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라 닫기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일 텐데. 난 문을 닫는 방법과 시기를 몰랐다. 무작정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언제 열지 언제 닫을지 날카롭게 살펴보는 분별력.
타인이 전해주는 생선살 안에 숨겨있는 가시를 잘 발라 뱉을 수 있는 분별력 ,
가시를 품은 생선살을 건네주는 사람에겐 웃으며 받고 가시를 뱉어낼 수 있는 노련함.
꽃을 꺾어다가 자신의 집 화병에 꽂는 것은, 꽃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인데
우리는 때론 나를 꺾는 말에 나를 지키지 못하고 무심코 꺾이지 않았던가.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말의 끝을 따라가 보면 우리라는 포장 아래 자신을 위해 한말일 수도 있다는 것.
그 말을 분별할 안목이 내겐 없었다. 삶은 내 분별력으로 재구성된다는 것을 그 당시엔 몰랐다.
이때부터였다. 창문을 닫는 시간을 늘린 것은. 언제든지 극단을 달리는 나는, 주변 사람 중 일부를 미세먼지로 인식하면서 한동안 문을 닫고 살았다. 그 당시 내겐 문을 열면 미세먼지가 가득한 뿌연 공기만 유입된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문을 열라는 사람들 말보다는 차라리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조개가 더 똑똑해 보일 정도였다.
소금을 풀어놓으면 입을 여는 조개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봐.. 결국 입을 여니 잡아먹히잖아?
실제로 나한테 다가와 "왜? 무슨 일 있어? 얼굴색이 안 좋아"라고 하며 창문을 두드리던 사람들,
그들 중에는 리트머스 종이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리트머스 종이가 물질의 산성과 염기성을 확인하는 지시 역할을 하듯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옳다' '그르다' 또는 '문제다' '문제 아니다' 이 둘로만 가르고 마는 사람들, 소통이 아니라 판정을 하는 사람, 마치 내가 식물 잎이 누레질 때마다 모든 원인을 물 부족으로 판정 내렸듯이 그들은 늘 같은 반응이었다.
" 뭐? 난 전혀 기억도 안나. 네가 잘못 안 거야."
"그건 문제도 아니네. 그냥 실수한 거 아닐까? 잘못한 걸로 안 보이는데 뭘 그래? "
"아 너 오해했나 보구나, 그건 그게 아니라 사실은...."
상처를 말하면 그저 '아프겠다'로만 바라보는 사람도, 잘못을 지적하면 그냥 "미안하다"로 인정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결국 그들과 나의 관계는 소통 실패로 저 식물처럼 시들어 죽었고 난 그들과의 소통의 창문을 닫았다.
창문은 공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도 되지만 햇빛을 받아들이라고도 있는 것.
햇빛은 환하게 대상을 밝혀준다. 햇빛으로 나의 구석구석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소통이란 명목 하에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지 않고 내가 나를 세밀하게 볼 수 있게 도와주는 햇빛의 시선을 좋아한다.
애틋한 걱정에서 시작해 탐구로 이어지는 시선은 내 부담을 덜어주려고 시선의 어긋남을 애써 선택하지만
조용히 다가와 우울을 말려주고 굳은 아픔을 녹여준다.
"아무도야, 괜찮아? 요즘 어때?"라고 오랜 망설임 끝에 묻는 사람,
"오늘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여?"라고 내 상태를 조심스레 가늠하는 사람,
"아무도야, 요즘 네 관심사는 뭐야?"라고 내 생각의 흐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사람.
그들은 내 눈망울 속 행복의 정도를 가늠한다. 주유 표시판에 빨간 불이 들어올 정도로 행복 수치가 바닥을 향해 경고등이 켜질 때면 서로가 서로에게 "오늘 바람 좀 쐴까?'라고 한 번씩 묻는다.
메시지를 주입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소통. 그런 소통의 첫머리를 들으면 그제야 창문을 열고 싶어 진다.
미세먼지에 시달리다 어느덧 청정해진 공기. 기다리던 환기 타임이 온 것 같다. 그 반가움, 해방감, 설레는 마음으로 창문을 활짝 열고 깊은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휴우... 이제야 살 것 같다.
그런 선택적 소통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문득 "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 "지금 그 자리가 당신이 원하는 곳 맞나요?" "당신의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묻고 싶어 지는 날이다.
"당신은 요즘 괜찮으신가요?"
<사진 출처: 픽사 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에 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