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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Oct 29. 2020

'무엇'이 아닌 '어떤'을 향하여

새싹은 어린나무의 전단계일뿐일까요?


"엄마는 그거 해서 뭐 하려고 그래요?"  

큰아이한테 자주 듣는 말이다. 새로운 일을 즉흥적으로 잘 저지르는 나를 보면 큰아이는 물론, 남편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곤 한다. 사실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일단 시작했으면 꾸준히라도 하면 모르는데 처음엔 열정적으로 하다가 어느 순간 심드렁해져서 팽개치는 일이 다수다.

난 '무언가'를 시작할 때, 그냥 그 '무엇'을 하려고 하지 '무엇'을 해서 '또 다른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창한 듯 말하지만  한마디로 계획성이 없단 뜻이다. 그래서 저 두 사람은 날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 작은 아이는 늘 그렇듯이 나와 비슷도 아니고 같은 입장이다.

"그냥 엄마가 좋으면 하는 거지.  꼭 뭘 해야 하나?"

내가 엄마여서 제일 행복하다는 작은 아이는 오늘도 내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서 준다.

평소 아빠의 노선을 이어가는 큰애가 다시 추월한다.

"엄마는 다른 거 쓰지 말고 그냥 해리포터 같은 작품 하나 써 보세요. 그렇지 않고선...(의미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하며 또 한 번 내 노선을 침범한다. 아들아 고맙다 내가 해리포터를 '안' 쓰는 걸로 보다니?


우리  식구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파'가 나뉜다.  좌파 우파도 아니고 아빠파 엄마파로. 남편과 큰아이는 외모도 닮은 데다 삶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목표지향적인 태도의 전형이다.  일단 목표가 생기면 '하면 된다'는 말을 가슴에 문신으로 새기고 돌진한다. 항상 '되는' 상상을 하며 그 상상을 연료 삼아 자신의 노력을 채워 넣는다. 

이 두 사람을 조금 거리를 두고 봤다면 "대단하다'했겠지만  그들의 모공수까지 셀 수 있는 거리에서 보다 보니 의외의 것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를  분출하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온다. 

" 당신(남편)과 큰애는 꼭 목표가 인생의 주인 같아. 정작 자신들은 목표의 도구 같고. 꼭 목표라는 팽이 줄로 자신을 팽이 돌리듯이 돌리더라. "

" 뭐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게 좋은 거야. 그래야 좀 더 발전적이지."

역시나~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영혼 없이 흘린다.  

그들은 늘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나서 목표를 성취하곤 한다. 그리고 다시 내비게이션 재설정을 하듯이 다음 목표를 설정한다. 그들의 인생은 목표 설정. 목표 쟁취를 위한 돌진, 성취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항상 지금 '하는 것' 은 미래의 '되는 것'의 기반이 된다. 이런 순환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곤 한다. 그렇게 '되고' '되고' '되려고' 살아간다.  


항상 목표만을 보고 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난 마음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상대방의 마음의 기차에 올라타 함께 창밖을 보며 속도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야기를 듣다가 말고 나 혼자 조용히 기차 뒷문으로 빠져나와 기차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멀미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그런 분리감이 늘 있다.


나와 작은 아이는 목표지향적인 삶을 거부하고 가치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취한다. 이런 태도가 순수하게 이상적인 생각으로만 출발한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인 영향도 꽤 있다.

"하면 된다고? 흥! 되니까 하는 거지" 하며 '되는 것'에 대해 애써 초월한 척한다. 실제로 우리 둘은 체력도 의지도 약한 편이어서 '해도 되지 않았던' 크고 작은 경험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있다.  머릿속 떠오르는 목표를 애써 삭제하는 버릇은 수많은 실패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목표가 없으면 실패도 없다는 얄팍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뛰지 않고 걷는 것처럼 말이다. '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비우고 '그냥 한다'.

우리 일상에 목표라는 것은 정면에 있지 않다. 가던 길의 옆면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가다가 줍게 되면 줍는, 대신 현재의 시간의 가치에 관심을  모은다. 그럼에도 결과에 대한 기대감은 수시로 은밀하게 찾아온다. 그때마다 정기적으로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르듯이 자라난 기대를 잘라낸다.  (그러니 실패가 쌓이지. 인정한다)

물론 가치 지향주의  삶의 본연의 모습도 사랑한다. 내 손에 무엇을 쥐었는지보다 나 자신이 멋있어지고 싶다 (는 배부른 소리를 입 밖으로 하고 다니진 못해도 마음속 깊이 늘 저장해 놓고 있다)  어설픈 목표에 집착하며 내가 바라보는 내가 우스워지는 게 싫다. 


남편과 큰아이,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우리 집 거실 벽 위에 걸려있는 그림 액자 같다. 벽에 박은 못에다가 액자 뒷면의 고리를 걸고 있는 그림. 위에 올라가 있지만 왠지 불안하다. 나로선 못이 지탱하는 힘을 믿고 나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모험 같아 보인다. 또한, 자신의 뒷목에 달린 고리의 힘에 의지해 걸려있는 것도 위태롭게만 보일 뿐이다.

나와 작은 아이는 바닥에 땅을 대고 앉아있는 도자기 화분 같다. 벽에 걸린 액자에 비해 떨어질 염려는 없지만 지나가던 이의 발걸음에  자주 치이곤 한다.  위태롭거나 치이거나.




11월은 꽃시장 비수기다. 딱히 예쁜 제철 꽃이 없다  몇 년 전 11월, 꽃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오면서 빈손이 허전했던지 아이는 꽃씨를 두 봉지 샀다.

"이거 사다 심으려고?"

"네, 한번 해 보려고요."

"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 해봐."

그날 작은 아이는 흙과 그 씨앗용 화분까지 사 가지고 집에 와 모종삽으로 흙을 담고 씨앗을 심었다. (이런 힘든 일은 늘 아이 몫이다. 아이는 흙을 만지는 걸 즐긴다) 그리고 틈만 나면 베란다에 나가 화분을 살펴봤지만 좀처럼 새싹은 나지 않았다. 화분 네 개에 나눠 심은 씨앗은 결국 흙속에서 나와보지도 못하고 모두 잠들었다.


나는 우리가 화분에 씨앗을 심고 지켜보는 동안,  남편과 큰아이의 시각으로 화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씨앗을 심으면서 '되고 싶다'는 자세를 간접 경험해 보게 된 것이다.

흙 속에 씨앗을 심었을 때,  흙을 바라보며 '새싹'을 미리 보기 한다. 씨앗이 새싹이 되어야만 성공한 것 같다.


씨앗 발아에 실패한 뒤 어린 모종을 사다 심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새싹을 보면서 어린나무를 미리 보기 한다. 새싹이 잘 자라 잎을 무성하게 달아야만 성공한 것 같다.

어린 나무 모습에선 늘 '꽃'을 미리 보기 한다. 꽃이 피어야만 될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는 조바심이 난다.

한 단계 앞당겨 그 모습을 상상하고 기대한다. 지금의 모습보다 '되고 난'후의 모습을 미리 보기 하며 기대하고 기다린다. 미리보기는 '되고 싶다'의 시선이다. 늘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꿈꾸지만 다음 단계에 이르면 또 다음 단계가 눈에 들어온다. 이 순환은 끝이 없다. 

목표지향적인 태도인 남편과 큰애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내 안에도 사실은 목표지향적인 면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단지 아프기 싫어서 애써 외면했을 뿐. 오히려 솔직히 직진하는 그들이  부러워졌다.

그런 생각을 다시 나의 일상에 적용해 봤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글을 쓰는 것이다. 목표지향적인 태도로 글을 쓴다면 어떤 단계를 걸치게 될까 생각해 봤다. 

일단 작가로 입문해야 한다.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단계에 해당한다. 

작가가 되면 출간을 하려고 한다. 한 권, 두권 책을 출간하는 것은 새싹이 가지에 잎을 무성히 다는 과정이다. 

출간 작가가 되고 나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그제야 작가로서 꽃을 피웠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런데 한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고 목표를 이루었다고 생각할까? 

아니다. 나도 한해 꽃 피운 화분이 다음 해 꽃을 못 피우면 그 식물 키우기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곤 했다. 

마찬가지로  바로 다음 책에서도 이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것이다. 다음 책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또 다음 책... 결국엔 스태디셀러 작가가 되고 싶은 목표가 생길터. 그렇게 10권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스태디셀러 작가가 되었다 해도 그 이후에 나온 책의 반응이 안 좋으면 바로 한물갔다는 소리를 들으며 한때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과거형 수식어를 앞에 붙이게 될 수도 있다. 현실은 냉혹하다. 


하다는 능동적이다. 미래에 매이지 않는다. 새싹을 그냥 새싹으로 본다. 글을 쓰는 자체를 즐기는 거다.

되다는 수동적이다.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에 기대야 한다. 내가 애써 외면했던 지배받는 삶, 수동적인 삶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수동적으로 살고 나서 후회에 후회를 거듭해왔다. 분명 성실하게 살아왔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다 보니 낯선 곳에 이르러 있었다. 나의 의지가 소멸된 곳.  그곳에서 한동안 길을 잃고 헤맸다. 그 뒤 마음 단련의 결과. 이제야 내 안에 인정 욕구를 소멸시키고 나서 자유로움을 누리게 됐다. 자유로움을 취하고 수동적인 삶을 거부해왔다. (아마 난 전생에 타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었던 게 분명하다)

지배하려는 이에 대한 거부감이 유난히 많은 나는,  이제부터는 수동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되고 싶다'를 이탈해 무작정 걸어 나가며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목표를 지워도 '하고 싶다'의 끝에 따라 나오는 '되고 싶다'를 직면하게 된다.  도달하려고 노력하기도, 애써 외면하기도 너무나 어려운 관문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떠올랐다. 내가 그 작가들을 좋아할 때의 마음을 그려봤다.

처음엔 책을 읽다가 문장 속에서 나를 발견할 때, 찾아드는 일치감에 외로움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느 순간 나와 다른 편에 서 있는 작품 속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어 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가는 작가의 해법이 유난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문득 그 낯선 길을 따라가고 싶기까지 했다. 이런 감정이 스며든다는 것은 이미 난 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나와 작품 속 화자의 공통점을 찾아가는 소극적 일치가 아닌, 그와 공통점을 만들어가고 싶은 적극적 일치의 충동을 불러일으킬 때, 비로소 난 그 작품과 더불어 그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그 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이기 때문도 아니고 스테디셀러 작가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결국 작가가  그'무엇'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작가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외면할 수 없는 '되고 싶다'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을 먹고 싶니?라고 묻는다면 '쌀국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음식'을 먹고 싶니"라고 물으면 "먹고 나면 몸이 따뜻해지고 개운해지는"음식이라고 말하곤 한다. (전에 외국인한테 '어떤'을 가르칠 때, 참 재미있었다)

나는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기보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다. 

'어떤'의 자리에는 목표가 아닌 가치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자리에 나만의 수식어를 채워 넣고, 그 수식어로 나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물론 글만 아니라 글을 쓰는 나의 모습, 글을 쓰는 나의 삶도 병렬적으로 가꿔나가야 할 것이다.

작가의 삶이 먼저고 그 이후에 나오는 것이 글이므로.


                                                                                                              <사진 출처: 픽사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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