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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Oct 18. 2020

둔감력

연잎의 방수효과를 배울 것


이번 매거진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이상적인 모습과 관계를 꿈꾸는 분께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저조차  몇 년 전에만 해도 받아들일 수 없던 결론이 다수 포함돼 있거든요.
나이 들면서 이상형이 바뀐다고 하지요? 저도 그래요. 이상형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삶의 이상향도 바뀌는 것 같아요. '이상향'만 쫓다가 삶이 '이상'해지는 경험을 해 본이라면 이해가 되시리라고 믿어요.
말하자면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에도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죠.  완벽한 칭찬, 완벽한 공감, 완벽한 관계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래 100점이 아니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네.
60점만 넘어도 그걸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도 있구나. '이런 시각에서 쓴 글입니다.


내 글을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난 민감, 까칠, 지질하다(찌질이 더 와 닿는데... 쩝)

타인의 뾰족한 말을 받아들일 때는 민감, 까칠하며 그 말에 제대로 반응 못 했을 때는 지질하기 그지없다.

기분 상하는 말을 민감하게 받아들였으면 그 자리에서 쿨하게 되받아치면 1라운드로 끝날 것을

상대방의 의도를 감지할 때는 민감한데 그 말에 반격할 때는 둔감해서 늘 타이밍을 놓친다.

이미 지나간 타이밍을 붙잡고 앉아있는 지질함이란.....

살면서 유난히 주변에 직언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차라리 뒷담화 하는 게 낫다. 뒷담화는 나를 어려워라도 하는 거지. 앞에서 대놓고 기분 상하게 말하는 사람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더 싫어'라고 말하곤 했다. 되돌아보면 그렇게 민감. 까칠. 지질함의 3종 세트로 날려버린 내 인생의 시간들이 제일 안타깝다.


직장 다닐 때 친하게 지낸 동료 중 한 명은 상대방이 비난을 하면 바로 센스 있게 한방을 날리곤 했다.

이른 아침 회의시간. 그 동료는 자신이 한 일을 교묘하게 비난하는 선배한테

"어머  이렇게 공개적으로 디스 하시는 거예요? 기분 상하네요.'

하며 직구를 날렸다. 변화구보다 강한 직구에 그 선배는 바로 고개를 숙여 말을 더듬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내 일생의 결핍을 대리보상받는 듯했다. 그날부터 그 동료는 내게 영웅이 되었다.

실제로 같이 다니면서 '순발력 체험학습'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그 분야는 학습으로 극복 안 되는 타고나는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나는 타고나길 순발력이 부족했다. 길에서 지인을 우연히 만나면 안면을 인식하는데 

 5. 4. 3. 2. 1  0 '아 안녕하세요' 하고 5 초나 걸린다는 걸 깨닫고 그때부터 순발력은 포기했다.

순발력을 포기하고 나니  나는 공격력을 보강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정교한 역공도 그 순간을 놓치면 '뒤끝'이 될 뿐이니까.


내게는 공격력 강화보다 수비력 강화가 시급했다.

수비력의 정점은 '들은 말 흘리기'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당신은 말하세요. 전 안 들어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계속 그러세요. 단. 저하고는 상관없어요' 이런 모드 장착이 필요했다





<물방울을 뱉어내는 연잎들. 방울방울 맺혀있는 물방울>
연잎의 표면은 물이 흡수되지 않고 물방울로 맺혀 굴러다닌다. (옆의 사진 참조)
물방울로 굴러다니는 것은 연잎 표면에 있는 미세돌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천 분의 1mm 크기의 미세돌기는 왁스로 덮여 있어 물이 스며들지 못하고 밀려난다. 연잎 표면의 이런 현상을 ‘연잎 효과’라고 한다(바르트로, 1997, 독일). 
연잎이 흙탕물에 살면서도 오염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잎에서  물방울이 굴러 떨어질 때마다  
흙을 떨구는 정화작용 때문이다.
연잎효과를 이용해 물의 침투를 막아주는 방수복이나 방수 용품을 만든다.
이를 생체모방기술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난 초 민감형으로 타고났다.  

흙탕물을 연잎처럼 굴러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민감형.  

흡수된 흙탕물로 만날 기분이 진흙탕이 돼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내 안의 미세돌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내 안의 미세돌기, 바로 둔감력. 방어력이다.






내 마음의 평온을 깨트리는 사람의 말에  '감정적 손절매' 할 것


언어학을 전공했지만 고등학생 때 내가 제일 잘했던 과목은 수학이다.(그나마)

그런데 보통의 수학 문제는 개념을 읽고 유형 연습하면 문제가 잘 풀렸던 반면, 확률과 통계는 좀 달랐다.

개념을 읽어도 답안을 보기 전에는 스스로 풀기 어려웠다. 되도록 답안을 안 보고 수학 문제를 풀려고 했던 내게 확률과 통계는 난관이었다. 답지를 안 보고  풀어보겠다는 고집으로 시험기간의 상당 부분을 그 단원에 쏟아버렸다. 그러는 동안 시험 기간이 2주 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시간을 소모할 수 없었다. 확률과 통계 단원의 유형을 주사위, 동전 등 종류별로 나눠서 답지의 풀이과정을 외워버렸다. 시험공부 황금시간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시험 2주 전에 방법을 바꿨기 때문에 시험을 무난히 치를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수학 단원 공부할 때처럼 '이해'가 될 때까지 붙들고 있었다면 난 시험 전날까지 수학만 잡고 끙끙대다 다른 과목 공부도 못하고 시험을 연쇄적으로 다 망쳤을 것이다.


<손절매>라는 말이 있다.  주식시장에서 쓰는 용어이다.( 주식은 하지 않지만 일상에서 많이 읽었다)

앞으로 주가가 더욱 하락할 것이라 예상하고, 가지고 있는 주식을 매입 가격 이하로 손해를 감수하고 파는 것이 손절매라고. 

수학에 있어서 확률과 통계는 내게 손절매 대상이었다. 노력으로 보상되는 다른 단원과 달리 사고력이 비상해야 풀 수 있는 확률과 통계는 애초에 내가 극복할 수 없는 단원이었다. 시간을 투여할수록 시간 대비 성과가 점점 마이너스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이 든다면 그 순간 노력을 투여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즉 빨리 손절매해야 더 이상의 손해는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손절매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를 쓸수록 기분만 더 상할 뿐이었다. 이해는커녕 , 매번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계속 되뇌며 나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손절매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대상을 손절매하지 않아서 상한 마음이 가족에게까지 번지기도 했다. 표면적인 관계는 유지하되 (이런 사람이 꼭 끊을 수 없는 관계인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의 말을 되뇌지 않는 훈련이 필요했다. 

말이 쉽지 그게 되냐고? 맞다. 나도 못한다. 그래도 빨리 털어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실제로 그런 모드 장착에 도움이 된 구절이 있다.


"No one ever kicks a dead dog."  


데일 카네기의 'How to stop worrying & start living'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No one ever kicks a dead dog."

죽은 개는 아무도 걷어차지 않는다. 타인이 자신을 비난할 때 되뇌면 효과 있는 말이다.


저자는 책에서 "중요한 사람일수록, 그를 걷어차는 사람들은 더 만족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누군가 나를 발로 걷어찬다면 나는 죽은 개가 아니라는 뜻이다.  저자는 "만일 비난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럼으로써 자신이 중요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라고 강조한다. 

자신보다 더 교양이 있거나 성공한 사람을 깎아내리는데서 천박한 만족감(savage satisfaction)을 얻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 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불쾌함이 우월감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람은 시기의 대상, 질투의 대상일 때 더 주목하고 헐뜯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비난한다면

'내가 이렇게 주목받을 만큼의 위치에 올랐나?' 생각의 전환을 해보는 것도 괜찮다.



뉴욕에서 비둘기만 보다가 오다


 <뉴욕의 가을>이란 영화가 있었다. 내게는 영화 내용보다 그 영화에 나오는 뉴욕의 가을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평소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다가 어느 한순간 확 꽂히곤 하는 나는 그 영화를 보고  '그래 가을엔 뉴욕이야'하고 준비 끝에 뉴욕으로 여행을 떠났다.


도착한 뒤 기대했던 뉴욕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길거리에 무방비로 노출된 쓰레기 봉지, 그 봉지에 골인하지 못한 채 나뒹구는 또 다른 쓰레기들. 그 쓰레기를 먹이 삼아 달려드는 거대한 비둘기들의 모습에 감동보다는 경악을 했다. 그 당시 병균을 잔뜩 내뿜고 다니는 비둘기는 내게 공포이자 혐오대상이었다. 비둘기가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를 때마다 세균이 내 머리 위에 두드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공포는 경계심을 낳았다. 거리를 걷는 내내 비둘기의 향방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비둘기가 언제 날아오를지 주시하느라 눈길은 비둘기에 고정돼 있곤 했다.


사흘 동안은 길거리에서 비둘기와 쓰레기 봉지만 보고 다닌 것 같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내 시야에 생동감 넘치는 뉴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바쁘게 걷는 사람들,  횡단보도 대기 중에도 신문을 힐끗 거리며 보는 아저씨, 이층 버스 안 관광객들, 무엇보다 메마른 도시 감성을 순화시키는 가을 나무들.

이제 며칠 후엔 뉴욕을 떠나야 하는데... 난 아름다운 풍경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뉴욕 시민의 광경을 놓치고 

쓰레기통과 쓰레기통을 뒤지는 비둘기만 눈과 마음에 담았던 것이다.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습은 뉴욕에서 비둘기와 쓰레기 봉지만 보던 것과 같았구나.'

뉴욕 여행에서  멋진 풍경과 광경을 뒤로하고 혐오스러운 모습만 보며 되뇌는 나의 자세는 그동안 내 인생의 축약판 같았다.

왜 시선을 빨리 돌리지 못하고 불쾌한 모습으로 파고들었던 걸까.  불쾌한 모습을 전체 광경의 '일부'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는 내 여행은 완벽해야 한다는 오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단 하나의 티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오만함.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요. 비난하고 싶으면 하세요.'하고 받아들이고 시선을 빨리 다른 곳으로 돌렸어야 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소중한 일상이 아닌,  나를 불쾌하게 했던 사람과의 경험을 마음에 오래 담아 놓는 것은 내 인생의 낭비였다. 


그 뒤로 기분 나쁜 일을 당하면 '뉴욕의 비둘기'에 집중하느라 놓쳤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 뒤,  곧바로 생각의 채널을 돌리려고 애쓴다.  센트럴 파크로.





<연꽃 사진 출처:픽사 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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